항목 ID | GC031004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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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廣州李氏 |
영어의미역 | Gwangju Yi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집필자 | 권만용 |
세거지 |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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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 |
입향시기/연도 | 조선 전기 |
성씨시조 | 이당 |
입향시조 | 이봉익 |
[정의]
이당을 시조로 하고 이봉익을 입향조로 하는 경기도 광명시 세거성씨.
[연원]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이당(李唐)을 시조로 하는 성씨로 조선시대에 정승 5명, 공신 11명, 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대장 2명, 판서와 대사성 및 기타 관직에 오른 자 66명을 배출하였다. 이당을 시조로 보는 견해와 달리 신라 17대 내물왕 때 내사령(內史令)을 지낸 이자성(李自成)을 시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자성은 칠원(漆原)에 세거해 온 호족의 후예로 신라에서 벼슬을 세습해 오다가 56대 경순왕 때 고려가 건국되자 이에 불복하고 절의를 지켰기에 고려 태조가 회안호장(准安戸長)[회안은 지금의 광주]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물왕 때부터 고려 초까지 살았다면 600년간을 산 것이 되므로 이 기록은 그대로 믿기가 어렵다.
이 때문에 광주이씨는 시조에 관한 여러 주장이 있는데, 처음에는 본관을 회안으로 하였다가 940년(태조 23) 지명이 광주로 개칭됨에 따라 광주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는 것으로 뜻을 모았다. 그 후 광주이씨는 이자성으로부터의 소목(昭穆)이 실전되어 고려 말에 이름을 떨쳤던 이당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광주이씨 분파는 둔촌(遁村) 이집(李集)을 1세조로 하는 둔촌공파(遁村公派), 이익비(李益庇)의 현손 이녹생(李祿生)을 파조로 하는 율정공파(栗亭公派), 이양중(李養中)을 파조로 하는 석탄공파(石灘公派), 이양몽(李養蒙)을 파조로 하는 암탄공파(巌灘公派)가 있다.
이당은 고려 말 국자감(國子監)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조선 건국 후에는 이조판서겸지의금부사(吏曹判書知義禁府事)가 되었다. 인화이씨(仁華李氏)를 부인으로 맞아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중 둘째 아들 이집은 문장과 덕망으로 고려 말에 명성을 떨쳤고, 이집의 맏아들 이지직(李之直)은 정몽주(鄭夢周)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1380년(우왕 6)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관찰사를 역임했으며, 조선 개국 뒤에는 보문각직제학이 되었고 청백리로 뽑혔다. 둘째 아들 이지강(李之剛)은 태종 때 예문관제학·한성부윤을 거쳐 의정부참찬겸사헌부대사헌을 지냈으며, 셋째 아들 이지유(李之柔)는 성주목사를 지냈다. 이지직은 3형제를 두어, 둘째 아들 이인손(李仁孫)은 세조 때 우의정, 셋째 아들 이예손(李禮孫)은 참판을 지냈다. 이인손은 5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은 어릴 때부터 글재주가 좋아 조정에서 실시한 각종 정시(庭試)에 매번 최고를 차지하였다. 31세에 대제학에 올랐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영의정에 올랐으나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였다가 관작이 삭탈되고 양근(陽根)으로 내려가 생을 마쳤다. 이항복(李恒福)·이원익(李元翼)과 함께 ‘혼조삼리(昏朝三李)’로 일컬어진다. 율정공파(栗亭公派) 중시조 이관의(李寛義)는 청백리 이지공(李知公)의 맏아들로 성리학 탐구에 몰두하여 학문에 정통하고 덕행이 뛰어나 정여창(鄭汝昌)·남효온(南孝温)·손순효(孫舜孝) 등 뛰어난 제자를 키웠다.
[입향경위]
광주이씨는 고려 말과 조선 전기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었고, 이후 각 지역으로 퍼져 인천 금화동에 정착한 일파가 시흥 지역으로 옮겨 오면서 광명에 정착하게 되었다. 조선 전기 단성현감을 지낸 이봉익(李鳳翼)이 인천 금화동에서 처음으로 지금의 광명시 가학동 도고내[道高川]에 정착하였고, 이후 후손들이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도고내는 마을 동쪽에 있던 광산촌인 솔안과 소하동 설월리를 이어 주던 도고내고개와 고갯마루에서 소하동·가학동으로 흘러내리는 작은 내[川]가 있어 붙인 이름이다.
[현황]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1985년 11월 당시 광명시에 거주한 광주이씨는 총 288가구에 1,130명, 2000년에는 413가구에 1,341명이었다. 1996년 당시 가학동에서 약 30가구가 집성촌을 이루어 15대째 살고 있었다. 현재 각지에 흩어져 있는 묘소를 노온사동 산221-1번지 일대에 있는 선산에 이장하였고, 매년 음력 10월 10일에서 18일까지 종친회 모임을 열고 있다.
[관련유적]
광명시 가학동 도고내 북쪽에 있는 웃말에 이봉익의 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