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4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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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化柳氏 |
영어의미역 | Munhwa Yu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집필자 | 권만용 |
세거지 |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 공석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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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 공석골 |
입향시기/연도 | 1671년 |
성씨시조 | 유차달 |
입향시조 | 유성귀 |
[정의]
유차달을 시조로 하고 유성귀를 입향조로 하는 경기도 광명시 세거성씨.
[연원]
문화유씨(文化柳氏)의 시조 유차달(柳車達)은 후삼국 통일 전쟁 당시 유주(儒州)[문화의 옛 이름]의 호족이었다. 유차달의 5대조인 유색(柳穡)이 신라 헌덕왕 때 유주 구월산(九月山)에 은거한 이래 자손들이 대를 이어 살다가 고려 개국 이후 개성에서 세거해 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군을 정벌할 때 군량 보급에 문제가 생기자 유차달이 수레 1,000량을 만들어 군량을 조달하였고, 그 공으로 대승(大丞)에 오르고 삼한공신(三韓功臣)에 봉해졌다. 유차달의 원래 이름은 유해(柳海)였으나 태조가 이차위달(以車爲達)하였다고 하여 유차달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유공권(柳公權)은 고려 명종 때 서예가로 추밀원사와 정당문학을 지냈고, 유경(柳璥)은 고려 고종 때 중서문하평장사·판도판서·성균관대사성에 올랐다. 유숙(柳淑)은 공민왕 때 예문관대제학을 지냈고, 8대손 유경(柳璥)은 고려 고종 때 최의(崔誼)의 무신 정권을 무너뜨림으로써 왕정을 회복하는 데 일조하여 위사공신(衛社功臣) 1등에 봉해졌으며 고향인 유주를 식읍으로 받았다. 이에 후손들이 유주, 즉 문화를 관향으로 삼았다.
유관(柳寬)은 조선 태종 대와 세종 대의 명신으로 예문관직제학에 있으면서 『태조실록(太祖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청백리의 귀감으로 전해 온다. 조선 개국 공신 유만수(柳曼殊)의 현손 유순(柳洵)은 연산군 대에 영의정을 지냈고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영의정에 올랐다. 유성원(柳誠源)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세종 대에 문과에 급제한 뒤 집현전학사가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유만수의 증손 유자미(柳自湄)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성삼문(成三問)의 나이 어린 딸을 몰래 데려다가 길러 며느리로 삼았다.
유관(柳灌)은 인종 대에 좌의정을 지냈고, 인종이 세상을 떠난 뒤 원상(院相)으로 서정을 맡았으나 소윤(小尹) 일파인 정순붕(鄭順朋)의 모함으로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은 현종 대의 실학자로 당대에 명성을 떨쳤고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저술하였다. 유상운(柳尙運)은 숙종 대에 영의정을 두 번, 판중추부사를 세 번 역임한 명신으로 문장과 글씨로도 유명하였다. 유상운의 아들 유봉휘(柳鳳輝)는 영조 대에 좌의정을 지냈고,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은 정조 대에 실사구시의 방법으로 산업 진흥을 주장했고 『발해고(渤海考)』를 저술하였다. 문장에도 뛰어나 ‘동국의 문봉(文鳳)’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 유상렬(柳相烈)은 3·1운동에 참여하여 주재소를 습격한 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투신하였다. 대한독립단 조맹선(趙孟善)의 명령을 받고 입국해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했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22년 서흥(瑞興)에서 사형되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유동열(柳東說)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구 한국군 참령(參領)으로 있다가 1907년 군대 해산 후 신민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복역한 뒤 만주로 망명하였고, 3·1운동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과 참모총장을 지냈다. 한때 공산주의로 전향하여 1921년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초대 통위부장이 되어 국군 창설에 기여했으나 6·25 때 납북되었다.
유진산(柳珍山)은 한국 야당 역사의 거목으로 신민당 총재를 지냈고, 유기춘(柳基春)은 문교부장관을 지냈다. 유병현(柳炳玄)은 농림부장관·합참의장·주미대사, 유양수(柳陽洙)는 교통부장관·동력자원부장관을 지냈다.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장을 지낸 유홍렬(柳洪烈)은 한국 문화와 사상사 연구의 권위자로 한국 근대사 연구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입향경위]
광해군의 장인 유자신(柳自新)의 고손으로 성균관진사를 지낸 유성귀[1620~1671]의 묘를 광명시에 쓰고 후손들이 묘 아래 정착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현황]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1985년 11월 당시 광명시에 거주한 문화유씨는 총 429가구에 1,670명, 2000년에는 673가구에 2,245명이었다. 현재 문화유씨는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 공석골에 세거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