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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024
한자 政治
영어의미역 Politics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광명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두한

[정의]

경기도 광명시에서 지역민을 통해 획득한 권력을 행사하여 지역 발전을 도모하는 총체적 활동.

[개설]

과거에는 정부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일방적인 정책의 추진이 가능하였지만, 현재는 국민의 이해 수준이 높아지고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의 출현으로 인하여 정책 환경이 매우 복잡하고 다양해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과거의 정부가 행정을 주도하는 중앙 행정식 관리를 벗어나 행정의 비대화를 극복할 수 있고 민주주의 정치의 실질 주체자인 개개인이 참여할 수 있는 지방자치제도를 1991년부터 도입하고 있다.

[변천]

1. 국회의원 선거

광명시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1985년 2월 12일]에서는 안양시, 시흥군, 옹진군과 함께 하나의 선거구를 이루었으나, 제13대 국회의원 선거[1988년 4월 26일]부터 독자적인 선거구를 가지게 되었다. 1988년에 실시된 제13대 광명시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주공화당의 김병용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3당 합당 후 맞은 1992년의 광명시의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는 민주자유당 김병용, 민주당 최정택, 통일국민당 윤항렬, 신정치개혁당 김은배, 공명민주당 유주봉, 민중당 유인렬 등이 각 정당의 후보로 출마하였고 이들 중 통일국민당의 윤항렬이 5만 3269표를 얻어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96년 4월 11일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선거구와 관련된 선거법 개정으로 광명시가 통합 선거구에서 2개의 선거구로 분구되었다. 따라서 각 정당별로 광명 갑, 광명 을지역으로 지구당 재등록 및 신설 지구당 등록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1996년 4월 11일 실시된 광명시의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는 2개의 선거구로 분구되어 치러졌다. 광명 갑은 신한국당 이덕화, 새정치국민회의 남궁진, 통합민주당 최정택, 자유민주연합 김재주, 국민연합 김석영 등이 출마하여 새정치국민회의 남궁진 후보가 당선되었으며 광명 을은 신한국당 손학규, 새정치국민회의 김은호, 통합민주당 김승남, 자유민주연합 차종태가 출마하여 신한국당의 손학규 후보가 당선되었다.

2000년 4월 13일 예정된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2002년 정치관계법 개정[의석 수가 26석 줄어 둠]으로 인하여 광명시는 다시 하나의 선거구로 통합되었다. 2000년 4월 13일 실시된 광명시의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는 한나라당 손학규, 새천년민주당 조세형, 자유민주연합 김재주가 출마하여 한나라당의 손학규 후보가 6만 5887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2004년 실시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광명 갑은 열린우리당의 이원형 후보, 광명 을은 한나라당의 전재희 후보가 당선되었다. 2008년 광명시의 제18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광명 갑은 통합민주당의 백재현 후보, 광명 을은 한나라당 전재희 후보가 당선되었다.

2. 지방자치선거

1952년 4월 25일 시·읍·면 선거가 전국적으로 실시되고 1956년에는 제2대 읍·면 의회 선거와 제1대 도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이어 4년 후인 1960년 제3대 읍·면의회 선거와 제2대 도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으나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지방 의회가 해산되면서 그 후 지방자치제는 30년 간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정치적 자유화의 흐름을 타고 국회는 1990년 12월 15일 지방자치법 개정안, 지방 의회 선거법 개정안,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면서 드디어 1991년 3월 26일 기초 의회 의원 선거가 시행되었고 6월 20일에는 광역 의회 의원 선거가 시행되었다.

1) 민선 1기 기초 의원·광역 의원 선거

1991년 6월 20일에 실시된 광역 의회 의원 선거는 당시 집권당이었던 민자당에 대한 중간 평가의 성격도 갖고 있었던데다 중앙 국회의원 선거와 유사한 행태들이 반복됨에 따라 상당히 혼탁한 양상을 표출하였다. 당시 경기도의 투표율은 과열됐던 선거 운동과는 달기 상당히 저조했으며 전국 투표율인 58.9%보다 낮은 55.4%를 기록하였다.

광명시에서는 3개의 선거구에 3명씩 출마하여 평균 3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투표결과 민자당의 구정회, 김상윤, 안병태 후보가 당선되어 민선 1기 경기도 의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각각 65.1%, 80.3%를 보인 전국과 경기도의 민자당 후보 당선율과 비교해 볼 때 광명시에서의 민자당 후보들의 득표율은 타 지역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1991년 3월 26일 실시된 기초 의회 의원 선거는 광역 의회 의원 선거보다 3개월 먼저 실시되었는데 광명시 18개동에서 총 22명을 선출했으며 이중 인구수가 많은 철산2동, 철산3동, 하안1동, 하안3동에서는 2명씩을 선출하였다. 철산3동의 장순원 당선자는 29세의 나이로 최연소 의원이 되었으며, 철산2동의 한문복 후보는 70세로 최고령의 의원으로 기록되었다. 평균 연령은 46세였으며 학력별로 대학원 졸업이 14명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서 대졸은 6명, 고졸 2명의 순이었다. 직업별로는 법무사, 세무사, 농업, 상업, 대표이사, 회사원 등 다양하게 나타났으며 정당인이 없는 것이 이채로웠다.

2)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1995년 실시된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임명제에 머물고 있던 기초 및 광역단체장을 직선으로 선출하게 된 최초의 선거였다. 1991년 지방 의회가 선거에 의해 구성되었으나 지방 의원들은 명예직으로 지방 정부의 실질적인 운영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1995년에 실시된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통해 실질적으로 지방 정부의 운영에 책임을 지는 각 지방 정부의 수장이 선출됨으로써 비로소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가 열렸다. 또한 이 선거는 광역 단체장, 기초 단체장, 광역 의회 의원, 기초 의회 의원을 뽑는 4개의 선거가 동시에 치러져 완전한 지방자치시대를 열었다는 정치사적 의미도 가졌다.

민선1기 광명시장 선거는 최초의 여성 관선시장 출신인 민자당의 전재희 후보와 행정 고시를 합격하고 역시 관선 광명시장을 역임한 민주당 김태수 후보 간의 격전으로 여러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선거였다. 민자당 전재희, 민주당 김태수, 자민련 문한옥, 무소속 박영하, 무소속 함병수가 후보로 출마하여 민자당의 전재희 후보가 43%[유효투표수 13만 6026표 중 5만 8274표]를 얻어 40%에 그친 김태수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이로써 전재희는 관선시장과 민선시장을 지내게 된 최초의 여성 시장이 되어 지속적인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민선2기 경기도의회 의원 선거에서 광명시는 인구 증가로 인해 선거구가 조정되었다. 지난 1991년 3개에서 1995년 5월 4일 처리된 통합선거법 개정안에 의해 4개로 늘어났으며 제1선거구[광명 1~3동·철산 1~2동], 제2선거구[광명 4~7동·학온동], 제3선거구[철산 3~4동·하안1동], 제4선거구[하안 2~4동·소하 1~2동]로 확정되었다.

백재현, 김도삼, 문부촌, 김영근 후보가 각 선거구에서 당선되었으며 이중 백재현과 문부촌은 광명시의회 의원이었다가 도의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한편 민선2기 광명시 의원 선거는 1991년 민선1기 때보다 광명7동, 하안2동, 소하2동에서 각각 1개 씩 3개의 의석수가 늘어나 모두 25개 의석으로 조정되었다.

3)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1998년 실시된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김대중 정부의 정권 교체 100일 시점에 실시되었다. 김대중 정부에 대한 국민적 평가와 함께 여당에게는 여소야대를 극복하기 위해 시도하는 정개 개편의 사전 정지작업이라는 점에서, 야당에게는 이를 저지하기 위한 대응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선거였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확산되는 추세 속에서 IMF 구제금융시대로 상징되는 경제난, 선거법 개정 과정의 진통으로 인한 선거 기간의 단축, 선거 운동의 제약 등으로 투표율은 52%에 머물렀다.

선거 결과 대선을 통해 집권한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상승세를 유지하였다. 광역단체장은 국민회의 6명, 자민련 4명, 한나라당 6명이 당선되었으며 기초단체장 당선자는 총 232명 중 국민회의가 36.2%, 자민련이 12.5%, 한나라당이 31.9%를 차지하였다. 국민회의와 자민련 두 공동 여당은 수도권·충청·호남·제주에서, 반면 야당은 강원과 영남에서 압도적 우세를 보이는 동서분할 구도를 보였다.

민선2기 광명시장 선거는 손학규의 경기도지사 출마에 의한 의원직 사퇴가 영향을 주었다. 한나라당은 출마가 예상되었던 전재희 광명시장 대신 전년도에 광명부시장을 지낸 유희두를 내세웠다[전재희 광명시장은 다음 달 7월 21일의 광명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 출마하였다].

48.8%의 투표율을 보인 가운데 56%[6만 3174표]를 얻은 국민회의 백재현 후보가 광명시 각 지역에서 한나라당 유희두 후보를 여유 있게 따돌리며 당선되었다. 백재현의 당선은 시의원과 도의원을 단계적으로 거친 기초단체장이라는 새로운 전형을 보여 준 것이기도 하였다.

민선3기 경기도 의원 선거의 경우 여전히 4개의 선거구를 유지했지만 동별로 선거구가 조정되어 광명1선거구[광명 1~3동·철산 1~2동], 광명2선거구[광명 4~7동·철산4동], 광명3선거구[철산3동·하안 1~2동·학온동], 광명4선거구[하안 3~4동·소하 1~2동]로 확정되었다.

선거 결과 공동 여당인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4곳의 지역구를 석권하였다. 민선3기 광명시 의원 선거에서는 선거법 개정으로 기초 의원은 광명시의 경우 각 동에서 1명의 시의원을 선출하게 되었다[학온동하안1동으로 통합]. 따라서 지난 선거에 비해 25석에서 17석으로 줄어 현역 시의원이 2명이었던 선거구에서는 불가피하게 현역 의원들끼리 경쟁하게 되었다.

4)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02년 6월 13일에 실시된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역대 전국 단위 선거 사상 최저인 48%의 투표율을 기록한 가운데 한나라당의 압승, 민주당의 완패, 민주노동당의 제3당 부상이라는 결과를 보였다. 민선3기 광명시장 선거에서는 월드컵 열풍과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 비리 문제로 유권자들의 관심이 멀어진 가운데 광명시 역시 45.6%라는 저조한 투표율을 기록했다. 현역 시장인 민주당의 백재현 후보와 한나라당의 차종태 후보 간의 양자 대결 구도를 보여 민주당의 백재현 후보가 51만 6581표[유효 투표수 10만 7925표]를 얻어 차종태 후보를 4% 차이로 누르고 광명시장에 재선되었다.

민선4기 경기도 의원 선거의 경우 2002년 정치관계법 개정으로 광명시는 지역구가 4석에서 3석으로 축소 조정되어 1선거구[광명 2~7동·학온동], 2선거구[광명1동·철산 1~4동], 3선거구[하안 1~4동·소하 1~2동]로 확정되었다. 선거 결과 3개의 선거구 모두 한나라당 후보[1선거구 박효진, 2선거구 김두영, 3선거구 이효선]가 당선되었다.

민선4기 광명시의회 의원 선거는 전과 마찬가지로 각 동별로 1명씩 선출하였다. 다만 지난 선거에서 하안1동에 속했던 학온동이 이번에는 광명7동과 함께 하나의 선거구를 이루었다. 선거 결과 재선 당선자가 11명으로 비율이 상당히 높았으며 총 17명 중 처음으로 의원직을 얻은 후보는 6명에 불과하였다.

5)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지난 10여 년 동안 3차례에 걸쳐 주민의 손으로 직접 지방 자치단체장과 지방 의원을 선출하게 되면서 법·제도적인 틀이 어느 정도 갖추어지게 되었다. 또한 그동안 여러 가지 불협화음과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을 통해 주민들의 자치 역량이 그만큼 신장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68.4%] 이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48.9%]까지 투표율이 하락하는 추세를 보였으나, 2006년 5월 31일 차러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51.6%를 기록하여 50% 이상의 투표율을 회복하였다.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광역단체장·기초단체장·지역구 광역의회 의원·비례 대표 광역의회 의원·지역구 기초 의회 의원·비례 대표 기초 의회 의원 등 전국 906개 기초 선거구에서 모두 2,888명[지역구 2513명·비례 대표 375명]이 선출되었다. 이 선거에서 선출된 단체장 및 의원들의 임기는 2006년 7월 1일부터 2010년 6월 30일까지 4년이다.

6)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10년 6월 2일 실시된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지방 정부의 일꾼을 선출하는 것 외에도 현 중앙 정부에 대한 중간 평가의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선거 결과는 이명박 정부의 향후 정국 운영은 물론 2012년 총선과 대권의 향배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치열한 득표전이 예상되었으나 결과는 한나라당의 참패로 끝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이명박 정부의 소통 문제에 대한 국민 여론의 반영이었고 4대강 사업과 세종시 문제 등의 정책에 대한 문제 제기로 보여 진다. 선거는 각 정당과 후보자들의 치열한 정책 대결과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장이 되어야 하나 이번 지방 선거에서는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인해 4대강 사업, 세종시, 무상 급식 등 지방 선거와 관련된 이슈나 선거 운동이 유권자로부터 큰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선거관리위원회의 잠정 집계에 의하면 투표율은 54.5%이며 20~30대의 투표율 증가가 두드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지방 선거는 한 사람이 8개의 투표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광역 단체장과 기초 단체장, 그리고 교육감 후보에 대한 유권자의 관심과 지식은 어느 정도 있었지만 교육 의원, 광역 의원, 기초 의원에 대한 정보 수준은 매우 낮았다. 경기도지사 선거에서는 유시민 후보의 거센 반격을 물리치고 한나라당 김문수 후보가 당선이 되었으나 전체적인 선거 결과는 여당인 한나라당의 참패였다. 광명시 역시 시장에 민주당 양기대 후보가 당선된 것을 비롯하여 광역 의원과 시의원에도 야당 후보들이 많이 당선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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