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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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明市民-無限-自矜心-光明-三大人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양철원 |
[개설]
경기도 광명시의 주산은 높이 237m의 구름산이다. 광명시의 중앙에 자리 잡고 광명시를 동서로 가르는 구름산은 아왕봉 또는 운봉(雲峰)으로도 불렸다. 바로 이 구름산의 서쪽에서부터 동쪽까지의 줄기를 타고 역사상 훌륭한 인물들이 터를 잡고 뜻을 펼쳤는데, 그들이 바로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1547~1634]과 소현세자의 빈인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1611~1646],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1783~1873]이다. 활약한 시기도 다르고 처지도 달랐지만, 그들은 중요한 역사적 시기에 자신만의 소신을 펼쳤고, 이 때문에 그들이 남긴 유적과 이야기는 광명 시민들의 자랑으로 남아 있다.
[청백리의 표상 오리 이원익]
이원익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한성부 유동(楡洞) 천달방(泉達坊)에서 태어난 그는 태종의 아들인 익녕군(益寧君) 이치(李錙)의 4세손으로, 아버지는 함천군 이억재(李億載)이다. 이원익의 세계(世系)는 익녕군 이치-수천군 이정은-청기군 이표-함천군 이억재-이원익으로 이어졌는데, 오늘날 광명시 소하동[옛 이름은 소하리]에 익녕군의 부인인 군부인 조씨의 무덤을 조성하고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이원익을 비롯한 전주이씨 가문의 소박한 선산이 조성되어 있다.
이원익이 활동한 시기는 조선의 성리학이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율곡(栗谷) 이이(李珥)로 대표되는 두 명의 사상가에 의해 꽃피우던 시기였다. 이원익도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성리학적 사상에 입각하여 활동했으나 백성의 삶을 개선하고 실질적인 정책을 구현하는 데 중점을 둔 경세가로서의 면모가 더 드러나는 인물이다. 그는 사람과 번잡하게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외출도 잘 하지 않는 성품이었다고 한다. 일찍부터 그의 비범함을 알고 있었다고 하는 다섯 살 위인 유성룡(柳成龍)과 평생을 두고 교유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원익은 성품이 소박하여 과장이나 과시할 줄을 몰랐고, 소임에 충실하며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그의 집은 두어 칸짜리 오막살이 초가였으며, 퇴관 후에는 조석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1623년(인조 1) 9월에 인조는 이원익의 77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궤장을 하사하고 잔치를 열어 주었으며, 1631년(인조 9)에는 초가로 된 거처가 안쓰러워 정당을 하사하여 내려 주니 극구 사양하다가 받았다고 한다.
1. 초기 관직 생활
이원익은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이듬해 승문원권지부정자로 활동했다. 1573년(선조6) 성균관전적이 되었으며, 그 해 2월 성절사 권덕여(權德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그 뒤 호조·예조·형조의 좌랑을 거쳐 그 이듬해 가을 황해도도사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병적(兵籍)을 정비하면서 실력을 발휘하였는데, 특히, 이이(李珥)에게 인정받아 여러 차례 중앙관으로 천거되었다. 1575년(선조 8) 가을 정언이 되어 중앙관으로 올라온 뒤, 지평·헌납·장령·수찬·교리·경연강독관·응교·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83년(선조 16) 우부승지로 있을 때, 도승지 박근원(朴謹元)과 영의정 박순(朴淳)의 사이가 좋지 않아 왕자사부 하락(河洛)이 승정원을 탄핵하였다. 이때 다른 승지들은 박근원과 박순의 불화로 인해 생긴 문제라고 주장하며 화를 면하려 했으나, 그는 다른 승지와는 달리 동료를 희생시키고 자신만이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상주하여 파면되었고, 이후 5년간 야인으로 있었다. 38세 되던 해인 1584년(선조 17), 그는 아버지 함천군의 상을 당해 소하리에서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다.
2. 다시 시작된 관직 생활
1587년(선조 20) 이원익은 이조참판 권극례(權克禮)의 추천으로 안주목사에 기용되었다. 그는 조정에 양곡 1만여 석을 청하여 기민을 구호하고 종곡(種穀)을 나누어 주어 생업을 안정시켰다. 또 병졸들의 훈련 근무도 연 4차 입번(入番)하던 제도를 6번제로 고쳐 시행하였다. 이는 군병을 넷으로 나누어 1년에 3개월씩 근무하게 하던 것을, 1년에 2개월씩 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킨 것이다. 이 6번 입번 제도는 그 뒤 순찰사 윤두수(尹斗壽)의 건의로 전국적인 병제로 정해지게 되었다.
당시 안주 지방에서는 뽕을 심어 누에를 칠 줄을 몰랐는데, 이원익이 권장하여 이공상(李公桑)[이원익이 계발한 잠상(蠶桑)이란 뜻]이란 말까지 생길 정도였다. 그 뒤 임진왜란 전까지 형조참판과 대사헌, 호조와 예조판서, 이조판서겸도총관, 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3. 임진왜란 시기의 활동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원익은 이조판서로서 평안도도순찰사의 직무를 띠고 먼저 평안도로 향했고, 평양이 함락되자 정주로 가서 군졸을 모집하고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어 평양성 인군에서 왜군에게 공격을 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595년(선조 28) 우의정겸4도체찰사로 임명되었으나, 그는 주로 경상북도 성주에 설치된 영남체찰사영에서 일하였다. 이 시기에는 구미의 금오, 창녕의 화왕, 함양의 황석산성 등 영남 지역의 산성을 수축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곽재우(郭再祐) 등의 의병장과 교류하며 영남 지역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도 긴밀히 협조하여 한산도에 주둔하던 부대를 격려하여 사기를 올리는 데 기여하였으며, 이순신이 파면 당하자 적극 옹호하여 다시 천거되는 데 기여하였다.
1599년(선조 32) 이원익은 영의정이 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사직하고 도성을 떠나 선산이 있는 소하리로 물러났다. 1601년(선조 34)에는 청백리에 천거되었는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이원익 같은 사람은 성품이 충량(忠亮)하고 적심(赤心)으로 국가를 위해 봉공(奉公)하는 이외에는 털끝만큼도 사적인 것을 영위하지 않았다.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나 의식(衣食)이 넉넉지 못하여 일생 동안 청고(淸苦)하였는데, 이는 사람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것인데도 홀로 태연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1604년(선조 37) 임진왜란의 공을 인정받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당초에는 선무공신(宣武功臣)에도 올랐으나 사양하였다고 전한다.
1608년에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원익은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그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경기도 지방에 한해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토지 1결(結)당 16두(斗)의 쌀을 공세(貢稅)로 바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임해군(臨海君)이 처형되고 대비 폐위론이 나오자 반대 상소문을 올려 1615년(광해군 7) 결국 홍천(洪川)으로 유배되었고, 73세 되던 1619년(광해군 11)에 풀려나 여주(驪州)에 머물렀다.
4. 인조반정으로 죽을 고비에 처한 광해군을 살리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되고 인조가 즉위하자 이원익은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반정으로 인해 성내의 민심이 불안했는데, 이원익이 영의정에 임명되자 민심이 안정될 정도로 백성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었다. 한편,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이원익은 인조에게,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면 광해군 밑에서 영의정을 지낸 자신도 죄가 크므로 벼슬에서 물러나야하지 않겠느냐고 설복하여 광해군의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이원익은 80세에 가까운 노구로 공주까지 왕을 호종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로 세자를 호위하여 전주로 갔다가 강화도로 와서 왕을 호위했으며, 서울로 환도하여 훈련도감제조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고령으로 체력이 쇠하여 사직을 청하고 낙향한 뒤, 여러 차례 왕이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5. 광명과 이원익의 인연
이원익은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서울의 여러 곳에 거처했으나 벼슬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에는 오늘날의 광명시 소하동 선산이 있는 곳에 집을 짓고 머물러 있었다. 이원익이 자신의 호를 딴 오리(梧里)는 소하동에서 현재 광명시 가학동으로 넘어가는 곳의 이름으로, 이원익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옛 지도[「군부인조씨이하십삼세족장분산도(郡夫人趙氏以下十三世族葬墳山圖)」]에도 지명이 나온다. 또한 소하동 설월리는 구전에 따르면 이원익이 달빛 아래 호미로 김을 매던 곳이라고도 전한다. 이외에도 이원익의 영정을 모시고 제를 지내던 사당인 오리 이원익 영우(梧里李元翼影宇)와 인조가 하사했으나 병자호란 때 불탄 것을 다시 복원한 집인 관감당(觀感堂)을 비롯해 이원익 선생 묘소 및 신도비 등이 남아 그의 정신을 전하고 있다.
[시대를 넘고자 한 당찬 여성 민회빈 강씨]
민회빈 강씨는 인조와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 사이에서 태어난 제1왕자인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의 빈(嬪)이다. 본관은 금천(衿川)이며, 민회빈(愍懷嬪)은 시호이다.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와 고령신씨(高靈申氏) 사이에서 5남 3녀 중 둘째 딸로 현 광명시 노온사동 능촌마을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1627년(인조 5) 9월에 세자빈으로 간택되고, 12월에 가례를 올렸으며, 1636년(인조 14) 원손(元孫)인 경선군(慶善君)[초명 이석철]을 낳았으며, 경완군(慶完君)[초명 이석린]·경안군(慶安君)[초명 이석견]과 경숙·경녕·경순궁주 등 3남 3녀를 두었다.
병자호란의 패전으로 본의 아니게 청나라의 수도 심양으로 끌려갔던 민회빈 강씨는 심양에서의 어려운 생활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고 적극적인 외교 활동과 수완을 발휘하여 심양에서의 생활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오랜 볼모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보람도 없이 소현세자의 급작스런 죽음과 권력 투쟁의 와중에 발생한 역모 혐의로 짧은 생을 마쳐야 했다.
1. 심양에서 드러난 빼어난 재주
민회빈 강씨는 1629년(인조 7) 첫아이로 딸을 두었으나 2년 만에 잃고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7년 만인 1636년(인조 14)에 큰아들인 경선군을 두어 모두가 기뻐했으나 기쁨도 잠시, 병자호란으로 인해 강화도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인조는 강화도와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결국 청나라에 항복을 했고, 민회빈 강씨는 1637년(인조 15) 2월[음력]에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로 청나라 수도 심양으로 끌려갔다.
소현세자는 가족과 수행원[판서 남이웅(南以雄)을 비롯한 300여 명]이 거처할 수 있는 심양관소(瀋陽館所)를 짓고, 이곳에서 조선 정부를 대리하는 현지 기관으로서 조선과 청나라와 연락 사항을 관장하였다. 또한 청나라 황제와 고관(高官)들과도 접촉을 갖고 양국의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 조정 내에서는 존명대의(尊明大義)란 명분 아래 반청(反淸)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인조 역시 점차 세자의 대청(對淸) 태도에 불만과 의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민회빈 강씨는 소현세자를 도와 청나라 고관들의 부인과 접촉하며 조선인 포로의 속환을 도모하거나 조선인을 동원하여 채소 농사를 지어 청나라 귀족들에게 높은 값에 파는 등 영민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민회빈 강씨는 이런 노력으로 얻은 경제적 부를 청나라가 반청 입장을 지닌 조선인 관리를 압박할 때마다 무마 비용 등으로 지출하였다. 한편 민회빈 강씨의 노력으로 심양관의 생활이 안정되자 소현세자는 북경까지 진출한 청나라 군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서 당시의 새로운 선진 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북경에 있을 때 세자는 당시 그곳 천문대에 와 있던 천주교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중국 이름 탕약망(湯若望)]에게 서구 과학 문명에 대한 여러 지식을 배웠고, 『천문역산서(天文曆算書)』와 과학·천주교에 관한 번역 서적과 여지구(輿地球)·천주상(天主像) 등을 선물 받고, 뒤에 귀국할 때에 가지고 왔다. 한편 중원(中原)을 제패(制覇)한 청은 명나라가 다시는 일어설 수 없다는 판단 하에 1645년(인조 23) 소현세자 내외를 돌려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세자 일행은 볼모로 잡혀 간 지 9년 만에 귀국하게 되어 같은 해 1월 18일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2. 귀국 후 이어진 고난
하지만 조선으로 귀국한 세자 내외에 대한 인조의 태도는 의구심(疑懼心)과 적대감으로 일관했다. 그것은 청나라에서 세자에게 전위(轉位)를 하도록 압력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문제와 함께 부왕의 기대와는 달리 세자의 친청적(親淸的)인 태도, 귀국 시 비단·황금 등 많은 물화(物貨)를 가져온 점, 특히 왕의 총비(寵妃)로 자신의 자녀를 왕위에 앉히고자 하는 야심을 품은 조소용(趙昭容)과 세자빈의 반목 등이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당시 세자빈 일행이 청나라에서 돌아올 때 인조의 명령으로 국고에 귀속시킨 양은 공식적인 세자의 물품은 채단 400필과 황금 19냥, 관소에 남은 4,700여 석의 곡식이었다고 한다. 인조는 세자빈의 개인 소장 물품도 귀속시켰는데, 은 1만 6,500냥, 황금 160냥, 왜검 19자루 등 많은 양이었다.
그런데 34세의 세자가 귀국 2개월 만에 원인 모를 병으로 급사(急死)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가벼운 병인 줄 알았던 세자의 병은 학질로 진찰되었는데, 조소용과 가까운 의관 이형익(李馨益)에게서 침을 맞은 후 사망하였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조의 의도를 간파한 조소용 측의 사주로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인조실록(仁祖實錄)』에도 “세자의 시신(屍身)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으며, 칠혈(七穴)에서 출혈되고 있어서 독약에 중독된 사람 같았다.”고 기술할 정도였다.
3. 강빈옥사와 복권
한편, 세자가 죽자 민회빈 강씨와 인조의 총비(寵妃) 조소용의 반목은 더욱 커졌다. 또한 조소용의 무고로 세자빈에 대한 인조의 태도도 정상이 아니었다. 세자의 독살 혐의가 짙은데도 인조는 입관(入棺)을 서둘렀고, 민회빈 강씨와 대신들의 간청도 뿌리치고 간소하게 장례를 지냈다. 남편인 세자의 장지와 장일(葬日) 문제에 대한 민회빈 강씨의 희망은 일축되었으며, 민회빈 강씨에게 시강원 재신(宰臣)들의 조위(弔慰)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인조는 세손[민회빈 강씨 소생의 제1왕손]을 왕위 계승자로 삼자는 상소도 물리치고는, 마침내 조정의 공론을 무시하고 세자의 아우인 봉림대군(鳳林大君)[훗날의 효종]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후 궁중의 분위기는 민회빈 강씨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다. 민회빈 강씨는 소의(昭儀) 조소용의 무고로 조씨에 대한 저주 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되었다. 이 사건으로 민회빈 강씨의 친정 형제와 자매들이 유배형에 처해졌다. 1646년(인조 24) 정월에는 어선(御膳)[왕이 먹는 음식]에서 독약이 발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사건의 장본인이 민회빈 강씨라는 무고가 있자, 인조는 민회빈 강씨를 후원 별당에 유폐시킨 후 같은 해 3월 마침내 사사(賜死)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인조가 민회빈 강씨를 제거하기 위해 민회빈 강씨를 따르던 궁녀들을 국문하게 했으나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죽음으로 항거하였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에서 궁녀들에게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만큼 믿음을 얻은 민회빈 강씨의 지도력을 엿볼 수 있다.
이른바 ‘강빈옥사’로 말미암아 70세에 이른 민회빈 강씨의 어머니 신씨 부인을 비롯해 강문두(姜文斗)·강문벽(姜文壁) 등 친정 동생과 궁녀·노비 등이 장살(杖殺)되고, 아버지 강석기의 관작도 추탈되었다. 또한 당시 13세이던 민회빈 강씨 소생의 세손 이석철(李石鐵)과 별손 이석린(李石麟)도 후환이 염려된다고 하여 제주도에 유배를 보내, 끝내 어린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뜨게 하였다.
민회빈 강씨가 사사되어 쓸쓸히 구름산 자락 친정 마을에 묻힌 지 72년이 흐른 1717년(숙종 43), 김장생을 스승으로 삼는 노론 대신 김창집이 강석기의 복관을 청하여 왕의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강석기의 증손인 강봉서가 격쟁을 하여 1718년(숙종 44) 4월 강씨는 세자빈으로 복권되었고, ‘민회(愍懷)’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민회빈 강씨는 무덤은 원래 소현세자가 묻혀 있는 소경원으로 이장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그대로 두고 민회원(愍懷園)으로 추존되었다가 1870년(고종 7) 영회원(永懷園)으로 개칭되었다. 광명시 학온동에 있는 영회원은 속칭 ‘애기릉’ 또는 ‘아왕릉(阿王陵)’이라고도 불리는데, 사적(史蹟) 제357호로 지정되어 있다.
[실리적인 자세로 관직과 학문 모두에서 성공한 경산 정원용]
정원용(鄭元容)[1783~1873]의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선지(善之), 호는 경산(經山)이다. 한양 남부(南部) 회현방(會賢坊)에서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낸 정동만(鄭東晩)과 어머니 용인이씨(龍仁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원용은 조선 정조 대에 태어나 1802년(순조 2) 과거에 급제한 후 1873년(고종 10)에 죽기까지 순조, 헌종, 철종, 고종 5대에 걸쳐 여섯 번이나 영의정을 역임하면서 조선 후기 격변의 시대를 바로잡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강원도·함경도·평안도의 관찰사 등을 역임하며 지방관으로서의 현실 감각을 익혔고, 청나라에 동지사로 파견되어 국제적인 흐름을 익혔다. 또한 영의정 등의 주요 관직을 역임하면서 조선 후기 문란해진 국가 정책을 바로잡고 자주 교체되는 왕위의 안정을 꾀하였다. 특히 그는 죽을 때까지 엄청나게 많은 글을 남기고 책으로 묶었는데, 이는 행정가로서뿐만 아니라 외교관, 법관, 학자(學者), 문인(文人)으로서의 그의 면모를 알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광명시 노온사동 사들마을은 그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1824년 42세 되던 해 11월 어머니 용인이씨의 상을 당해 새로 묘역을 정하고 일족의 묘를 쓰기 시작하면서 생애 중요한 공간으로 남게 되었다.
1. 벼슬길에 나아가다
정원용은 1802년(순조 2) 정시문과 을과(乙科) 제2인으로 급제한 뒤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예문관의 검열과 봉교(奉敎), 홍문관의 수찬과 교리(校理)·응교(應敎), 규장각의 직각(直閣)·직제학(直提學), 이조·예조·병조·형조의 참의(參議), 호조·이조·병조의 참판(參判), 사간원대사간, 사헌부대사헌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821년(순조 21) 괴질이 서북 지방에 크게 번지고 10만여 명의 사상자가 생기면서 천재(天災)까지 겹쳐 민심이 흉흉해지자 관서위유사(關西慰諭使)에 임명되어 평안도 지방을 돌아보고 실상을 조사하여 대책 마련에 힘썼다. 1837년(헌종 3) 예조판서로 승진되고, 이후 이조판서를 비롯하여 공조·병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한 뒤, 1841년(헌종 7)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2. 72년간의 관직 생활, 여섯 차례나 영의정에 오르다
1848년(헌종 14) 정원용은 처음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헌종이 승하하자 강화도에 살고 있던 덕완군(德完君)의 영립(迎立)을 주장하여 종사를 이으니, 그가 바로 철종이다. 이후 영중추부사와 총호사(摠護使) 등을 지내고 행정 일선에서는 물러났으나, 관기(官紀)가 문란하고 삼남 지방을 비롯한 각처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암행어사 제도를 부활하자고 건의하기도 했다.
1862년(철종 13) 지방관의 수탈과 불합리한 조세 제도로 인해 진주민란이 일어나는 등 사회가 불안해지자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의 총재관이 되어,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을 시정하려 하였다. 그는 삼정 가운데서 정액(定額) 이상의 가산(加算) 징수로 민원(民怨)이 그치지 않던 환곡(還穀)의 가작(加作)에 관련하여 민소(民訴)가 일어날 때마다 관리를 엄중히 문책하도록 하였다.
1863년 철종이 승하하자 원상(院相)이 되어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국정을 관장하였고, 이듬해에는 실록청총재관(實錄廳總裁官)이 되어 『철종실록(哲宗實錄)』 편찬을 주관하였다. 그는 순조·헌종·철종·고종 등 4대에 걸쳐 72년간 조정에서 벼슬하는 동안 여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며, 의정부와 중추부(中樞府)에 재임한 기간이 33년간에 이르렀으나 늘 검소하게 생활하며 청렴결백했다고 한다. 1873년(고종 10) 1월 4일 노환으로 별세한 후 평소 그가 돌보던 광명시 노온사동 사들 선산에 묻혔다. 1874년(고종 11) 문충(文忠)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3. 개인이 누린 복록과 방대한 저술
정원용은 91세로 장수를 누렸다. 그리하여 1857년에는 결혼한 지 60주년으로 회근례(回巹禮)를 행하였고, 1862년에는 과거에 합격한 지 60주년[回榜]을 맞이하여 철종에게 궤장을 하사받고 세 아들과 사위도 현달하는 등 영화를 누린 인물이었지만 학문의 연구에도 게을리 하지 않고 공리공론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여 실질적인 정책에 반영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의 실사 구시적인 관점은 90년 전 생애를 기록한 『경산일록(經山日錄)』을 비롯한 방대한 저술에 남아 있다. 특히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작성한 공문을 모은 『관첩록』·『북관첩』·『서관첩』, 형조판서로 재임할 때와 평안도관찰사 시절 처리한 살인사건에 관한 초록인 『유경록(惟輕錄)』은 실용적인 평소의 태도가 잘 드러난 저술로 알려져 있다.
5. 광명과 정원용의 인연
정원용은 노온사동 사들에 부인 강릉김씨와 합장되어 있으며, 광명시 향토문화유산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묘비는 1876년(고종 13)에 건립된 것으로, 명(銘)은 이조판서를 지낸 맏아들 정기세(鄭基世)가 지었으며, 글씨는 우의정을 지낸 손자 정범조(鄭範朝)가 썼다.
1824년 어머니가 작고하자 정원용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합장하여 노온사동 아왕리(阿旺里)[『경산일록』 표기에 따름]에 모신 후 1년에 몇 차례나 내려와 시제를 지내고 가족들이 머물 집과 연못을 조성하고 농토를 마련하여 가산으로 삼았다고 한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정원용이 지은 집은 99칸이나 되었다고 전한다. 아왕리 주민들은 1980년까지만 해도 음력 정월 초3일에 정원용 묘 앞의 신목과 마을 우물에서 정원용의 신위를 모시고 군웅제를 지냈다고 한다.
[과거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설계하다]
오리 이원익과 민회빈 강씨, 경산 정원용은 광명시를 연고로 한 위대한 인물들로, 활동 시기와 배경은 달랐지만 현실적이고 직접 행동하는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원익은 안주목사 시절과 임진왜란 후 영의정으로서 양잠을 보급하고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주장하여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주력하였다. 민회빈 강씨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갔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 수완을 발휘하여 조선인 속환 사업과 농장 경영 등에 나선 선구적인 인물이다. 정원용 역시 오랜 관직 생활 동안 세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환곡의 문란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등, 끊임없이 백성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원익의 실용적인 정책 제안과 검소한 생활, 민회빈 강씨의 진취적 자세, 정원용의 치밀한 정책과 기록의 정신은 무한 경쟁의 국제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극복과 승리를 위한 진정한 삶의 정수를 보여 준다. 특히 소하동과 노온사동에 남아 있는 세 사람의 유적과 흔적은 미래를 열어 가는 우리에게 과거로부터 아름다운 미래를 열 수 있게 하는 구체적인 문화 콘텐츠를 창조할 수 있는 자산으로서 선의의 과제를 남겨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