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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411
한자 吳駿善
영어공식명칭 O Junseon
이칭/별칭 덕행,후석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노기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1년 10월 14일연표보기 - 오준선 출생
수학 시기/일시 1868년 - 오준선 기정진 문하에서 수학
몰년 시기/일시 1931년 6월 21일연표보기 - 오준선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39년 - 용진영당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0년 12월 24일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서 『의병전』을 『독립운동사』 제1권 '의병항쟁사'로 편찬
출생지 전라도 광주목
활동지 용진정사 -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동서로 180-68[왕동 3-1]지도보기
묘소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호동 지도보기
성격 학자
성별
대표 경력 기호사림 종장

[정의]

개항기~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활동한 유학자.

[개설]

오준선(吳駿善)[1851~1931]의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덕행(德行), 호는 후석(後石)이다. 1851년(철종 2) 10월 14일 전라도 광주목[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삼도동] 도림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오하규(吳夏圭)와 어머니 금성나씨(錦城羅氏)의 3남 중 장남으로 유년기에 큰아버지 오항규(吳恒圭)와 큰어머니 순천박씨(順天朴氏)에게 입후(立後)하였다. 아내는 상산김씨(商山金氏)이며, 아들은 오헌수(吳憲洙), 손자는 오근호(吳根浩)이다.

기호사림(幾湖士林)의 종장(宗匠)으로 용진정사(湧珍精舍)를 지어 제자들을 양성하였으며, 제자 중에는 호남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한 제자들이 여러 명 있었다. 오준선은 의병들의 행적을 모아 『의병전(義兵傳)』을 찬술하였으며, 여러 차례의 압박에도 일본 천황이 주는 은사금(恩賜金)을 거부하고 죽을 때까지 선비의 절개를 지켜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에는 오준선의 생가와 오준선이 초기 수학한 지어재(志於齋), 사우(祠宇)인 도림사(道林祠)가 있다. 또한, 오준선이 수학하거나 머물렀던 빙설당(氷雪堂), 영사재(永思齋), 용진정사가 있다. 1917년에 건립된 용진정사오준선이 15년간 머무르면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일제 침략을 반대하며 후학을 가르친 곳이다.

[활동 사항]

오준선은 유년기에 족숙(族叔) 오태규(吳泰圭)에게 학문을 배웠다. 1868년(고종 5) 18세 되던 해에 당시 71세의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 들어갔다. 오준선은 기호학파(畿湖學派)의 맥을 이은 기호사림의 종장으로 절의와 예를 철저히 실천하였다. 그 결과 『문인록(門人錄)』에 기록된 제자들만도 무려 634명에 달한다. 오준선의 제자 중 오상렬(吳相烈), 이기손(李起巽), 오성술(吳成述), 전수용(全垂鏞) 등은 무장투쟁을 전개한 의병장들이다.

오준선은 1908년 2월 2일 김태원(金泰元)[김준(金準)] 의병장이 담양군 창평현 무동촌(茂洞村) 전투에서 일본군 광주수비대장 요시다 카츠히로(吉田勝三郞) 소좌를 사살하고 승전한 상황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기삼연(奇參衍), 고광순(高光洵), 전수용, 기재(奇宰), 오계수(吳繼洙), 심남일(沈南一) 등의 행적을 수집하여 용진정사에서 『의병전』을 찬술하였다.

일제는 호남의병의 사표(師表)로 명망이 높은 오준선에게 일왕이 주는 은사금을 수령하도록 협박하였으나, 오준선은 일제 우두머리의 금품을 받을 수 없는 이유를 적은 「각금전말(却金顚末)」을 통해 거부하였다. 1911년 5월 전라남도 나주군 삼도면[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삼거리헌병분소 소장은 은사금을 받아가라고 재차 경고하였고, 이에 오준선은 다시 한 번 강력히 거부하였다. 이때 오준선은 일본 천황의 은사금 수령을 거부하였다는 죄목으로 1911년 5월 5일부터 삼거리헌병분소와 장성헌병분대에 잡혀가 20여 일 동안 투옥되어 온갖 고초를 겪었다.

1911년 6월 중순 오준선은 또다시 장성헌병분대로 끌려갔다. 이 자리에서 일제 헌병은 강제로 일본 천황의 은사금 봉투를 소매 속에 넣어주며, 은사금을 받으라고 하였다. 오준선은 책상 위에 은사금을 내던지며 망국 유민의 의리를 지켰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오준선은 "국가의 변란에 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지 않고는 백립(白笠)을 벗을 수 없다."고 평생 백립을 쓰고 일제에 항쟁 의지를 나타냈다. 1924년 당시 77세인 화가 채용신(蔡龍臣)은 74세였던 오준선이 상복에 백립을 쓰고 있는 초상화를 「용진정사지도(湧珍精舍地圖)」와 함께 그렸다.

[저술 및 작품]

1904년 오준선의 조카 오동술(吳東述)과 종손(族孫) 오근호(吳根浩) 등이 오준선의 시문집 『후석유고(後石遺稿)』 25권 13책을 편집, 간행하였다.

[묘소]

전라남도 광산군 본량면 동호리[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호동] 석문산의 석문동천(石門洞天) 빙설당 앞 선영에 오준선의 묘를 조성하였다. 일본 경찰의 탄압에도 오준선의 묘비에는 '조선유민후석선생오공묘갈명(朝鮮遺民後石先生吳公墓碣銘)'이라고 새겼다.

[상훈과 추모]

1939년 오준선의 문인들은 용진영당(湧珍影堂)을 건립하였다. 1970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서는 광복 25주년을 기념하여 오준선의 『의병전』을 『독립운동사』 제1권 '의병항쟁사'로 편찬하였다. 2006년 6월 27일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는 독립기념관에서 ‘오준선과 한말의병’이라는 학술 발표회를 개최하였고, 2011년 11월 16일 오은열과 오맹교의 후원으로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에서 '후석 오준선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3.06.27 내용변경 [정의] 개항기→개항기~일제 강점기, [활동 사항] 일본 천황이→일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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