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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019
한자 黃尙鎬
영어공식명칭 Hwang Sangho
이칭/별칭 황송우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황상호 제중원 근무
활동 시기/일시 1931년 - 황상호 평양신학교에서 목사 안수
활동지 제중원 - 전라남도 광주군
활동지 광주YMCA - 전라남도 광주군
성격 사회운동가|목사
성별
대표 경력 『조선독립광주신문』 발행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에서 3.1운동에 참여하였고, 광주YMCA에서 활동한 사회운동가.

[개설]

황상호(黃尙鎬)제중원[지금의 광주기독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3.1운동에 참여하였다. 만세 시위 후 『조선독립광주신문』을 4호까지 발행하였다. 이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의 선고를 받았다. 광주YMCA에서 활동하였고, 평양신학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활동 사항]

황상호는 개신교 신자로 제중원의 회계를 담당하는 직원이었다. 제중원에 근무하던 1919년 3월 전라남도 광주에서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던 김복현, 김강 등과 함께 만세 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황상호의 판결문을 보면 "전라남도 광주 작은 시장에서 서문통을 지나 광주우편국 부근까지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세 시위 후 황송우(黃松友)라는 가명으로 『조선독립광주신문』을 제4호까지 발행하였다. 『조선독립광주신문』은 윤익선(尹益善)의 명의로 발행된 『조선독립신문』을 보고 발행한 것이다. 『조선독립광주신문』의 주요 내용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울에서 민족 대표와 함께 우리 민족이 만세 시위를 전개하다, 민족 대표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둘째,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은 일본에 복종하고 있다.'는 내용의 글을 보내기 위해 고종에게 서명을 강요하였고, 이를 거절하자 독살하였다. 셋째, 미국 대통령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므로 우리가 국권 회복을 부르짖으면 그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신문을 비밀리에 등사하여 유포하였다. 이로 인하여 황상호제중원의 간호사 홍덕주(洪德周)와 약제사 장호조(張鎬祚)와 함께 체포되었다. 황상호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의 선고를 받았다. 출소 후 황상호는 금정교회[지금의 광주제일교회]에서 장로로 활동하였다. 또한 광주YMCA에 참여하여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광주YMCA가 담양에 가 소인극을 하였다는 기사를 찾아볼 수 있는데, 광주YMCA를 이끌었던 황상호도 함께 참여하였다. 이 밖에 일제강점기 꾸준히 계몽운동 관련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31년 평양신학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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