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7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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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因厚 |
영어공식명칭 | Go Inhoo |
이칭/별칭 | 선건(善健),학봉(鶴峯),의열(毅烈)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창우 |
출생 시기/일시 | 1561년 - 고인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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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79년 - 고인후 진사 입격 |
활동 시기/일시 | 1589년 - 고인후 증광시 병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89년 - 고인후 성균관학유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592년 - 고인후 금산전투에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94년 - 고인후 시호 의열(毅烈) 추증 |
묘소|단소 |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 |
사당|배향지 | 포충사(褒忠祠) - 광주광역시 남구 포충로 767[원산동 775] |
사당|배향지 | 종용사(從容祠) -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 167-2 |
성격 | 문관|의병장 |
성별 | 남 |
본관 | 장흥(長興) |
대표 관직 | 성균관학유 |
[정의]
조선 전기 광주 지역 출신으로 성균관학유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임진왜란 때 의병장.
[가계]
고인후(高因厚)[1561~1592]의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자는 선건(善健), 호(號)는 학봉(鶴峯)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고운(高雲), 할아버지는 고맹영(高孟英), 아버지는 임진왜란의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고, 어머니는 김백균(金百鈞)의 딸 울산김씨(蔚山金氏)이다. 고인후는 고경명의 둘째 아들이다. 부인은 이경(李璥)의 딸 함평이씨(咸平李氏)이며, 4남 1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고인후는 19살의 나이인 1579년(선조 12)에 진사에 입격하고, 1589년(선조 22)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전체 16위]. 『호남절의록』에 따르면, 고인후가 과거에 급제한 이후 조정에서 고인후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여 한림원이나 홍문관에 배치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아버지인 고경명이 당시 척신들의 미움을 샀기 때문에 겨우 종9품에 불과한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로 보임시켰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고경명, 형 고종후와 함께 전라도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7월 10일 벌어진 금산전투에서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왜군에게 패배하여 아버지와 함께 전사하였다. 이때 고인후의 나이 32세였다.
[묘소]
고인후의 묘소는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94년(숙종 20) 고인후에게 의열(毅烈)이란 시호가 추증되었다. 광주광역시 남구 포충로 767[원산동 775]에 있는 포충사(褒忠祠)는 1601년(선조 34) 고경명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으로, 1603년(선조 36)에 ‘포충(褒忠)’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이후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 고인후와 유팽로, 안영 등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을 내릴 당시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과 함께 전라도 일대에서 헐리지 않은 사당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때 폐사를 면치 못하였지만 1978년 호국선열유적지 정화사업으로 크게 정비되었다. 1974년 5월 22일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 167-2번지에 있는 종용사(從容祠)는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약 700위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1647년(인조 25)에 세워졌고, 1663년(현종 4)에 ‘종용(從容)’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2차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700위의 의사를 제향하고 있으며, 고인후와 아버지 고경명 및 형 고종후도 배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