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1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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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玄東 |
영어공식명칭 | Bak Hyeondong |
이칭/별칭 | 하은,서일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효선 |
[정의]
대한제국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 출신의 의병.
[개설]
박현동(朴玄東)[1886~1962]은 1886년(고종 23) 전라남도 광주군 와곡면 상촌[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장수길 33]에 있는 율수재(聿修齋) 뒤 살림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서일(瑞日), 호는 하은(河隱)이다. 율수재는 최익현(崔益鉉)의 제자였던 아버지 박해량(朴海量)과 박현동의 강학 공간이었다. 박현동은 최익현 의병진에서 좌익장(左翼將)으로 최익현을 가까이서 보좌하며 의병 활동을 하였다.
[활동 사항]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6년 4월 최익현은 '근고팔도민서(謹告八道民書)'라는 격문을 각지로 띄웠다. 박현동은 격문을 보고 최익현 의병진에 가담하여 좌익장으로 배종(陪從)하였다. 박현동은 의병 200여 명과 소총 20~30정으로 무장하고 전라남도 광주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기 위해 충청남도 공주를 떠났다. 전라북도 임실에서 의병 80여 명과 총기 50정을 확충하고 최익현의 근거지인 전라북도 순창에 주둔하였다.
1906년 4월 7일부터 8일 사이에 최익현 의병진을 저지하기 위해 집결한 일본군 진위대와 수비대를 상대로 순창 읍내에서 교전하였으나 패퇴하였다. 박현동은 최익현이 일본군에 사로잡혀 대마도(對馬島)에 끌려가 사망하자 고초를 겪으며 손수 최익현의 유해를 거두어 조국 땅에 안치하였다. 그 뒤 전라남도 담양 흥용사에서 군영을 정비하던 중 일본군에 붙잡혀 1910년 3월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유형(流刑)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국권 피탈로 일제의 밀계(密計)가 이루어지자 석방되었다.
[상훈과 추모]
1958년 2월 밀양박씨(密陽朴氏) 문중에서 광주광역시 광산구 창암길 125-20에 '하은의사박현동표성비(河隱義士朴玄東表誠碑)'를 건립하였다. 1982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