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7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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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祥 |
영어공식명칭 | Park Sang |
이칭/별칭 | 창세(昌世),눌재(訥齋),문간(文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창우 |
출생 시기/일시 | 1474년 - 박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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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96년 - 박상 생원 입격 |
활동 시기/일시 | 1501년 - 박상 식년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01년 - 박상 교서관정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03년 - 박상 병조좌랑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05년 - 박상 전라도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07년 - 박상 한산군수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08년 - 박상 임피현령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11년 - 박상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12년 - 박상 담양부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17년 - 박상 순천부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21년 - 박상 충주목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27년 - 박상 나주목사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530년 - 박상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88년 - 박상 이조판서 추증 |
추모 시기/일시 | 1729년 - 박상 시호 문간(文簡) 추증 |
사당|배향지 | 월봉서원(月峰書院) -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곡길 133[광산동 452] |
사당|배향지 | 봉산재(鳳山齋) - 광주광역시 서구 사동길 93[서창동 38-1] |
성격 | 문관 |
성별 | 남 |
본관 | 충주(忠州) |
대표 관직 | 전라도사|담양부사|순천부사 |
[정의]
조선 전기 광주 지역 출신으로 전라도사, 담양부사, 순천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박상(朴祥)[1474~1530]의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박광리(朴光理), 할아버지는 성균진사 박소(朴蘇), 아버지는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박지흥(朴智興)이고, 어머니는 서종하(徐宗夏)의 딸 계성서씨(桂城徐氏)이다. 박상의 전처는 현령(縣令) 유종한(柳宗漢)의 딸 문화유씨(文化柳氏)로, 유씨와의 사이에 박민제(朴敏齊), 박민중(朴敏中) 두 아들을 두었다. 박상의 후처는 생원(生員) 정세(鄭稅)의 딸인 하동정씨(河東鄭氏)로, 정씨와의 사이에 아들 박민고(朴敏古)를 두었다.
[활동 사항]
박상은 1496년(연산군 2)에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5년 뒤인 1501년(연산군 7)에 식년시에 2위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에 임명됨으로써 관직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과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를 거쳐 1503년(연산군 9)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올랐다. 박상은 1505년(연산군 11년) 전라도사(全羅都事)로 발탁되어 외직으로 나갔는데, 이때 이른바 ‘우부리 장살 사건’이 일어났다. 우부리(牛夫里)의 딸은 당시 임금인 연산군의 후궁이었는데, 우부리가 이를 기회로 나주 일대에서 횡포를 일삼자, 박상이 우부리에게 장형을 내려 죽인 사건이다. 그해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박상은 화를 면하였으나, 중종반정에 공이 있는 자들을 공신으로 책정하는 과정과 결과가 잘못되었음을 극론(極論)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이 이후 박상은 외직 생활을 계속하였다. 박상이 거쳐 간 외직은 1507년(중종 2) 한산군수(韓山郡守)를 시작으로, 1508년 임피현령(臨陂縣令), 1512년 담양부사(潭陽府使), 1517년 순천부사(順天府使), 1521년 상주목사(尙州牧使)·충주목사(忠州牧使), 1527년 나주목사(羅州牧使) 등이었다. 결국 박상은 1529년(중종 24) 모든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가 이듬해인 1530년 4월에 사망하였다.
박상은 1515년(중종 10) 당시 순창군수였던 김정(金淨)과 함께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와 박원종(朴元宗) 등 훈구대신의 탄핵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중종의 노여움을 사 남평(南平) 오림역(烏林驛)에 유배되었다. 이처럼 의리를 존중하고 실천하였던 박상은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는 피해를 보지 않았다.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2년 전인 1517년에 어머니가 사망하여 박상이 광주에서 3년상을 치르느라 조정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학문과 저술]
1694년(숙종 20)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최규서(崔奎瑞)는 박상의 문집인 『눌재집(訥齋集)』을 간행하였다. 『눌재집』은 전체 16권 6책의 목판본으로, 권두에 박상의 동생인 박우(朴祐)의 서문, 권말에 김창협(金昌協)의 발문이 보인다.
[묘소]
박상의 묘소는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절골마을의 봉산재 뒤편 봉황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88년(숙종 14) 박상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729년(영조 5) 박상에게 문간(文簡) 시호가 내려졌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에 있는 월봉서원(月峰書院)은 박상을 비롯하여 고봉 기대승(奇大升), 박순(朴淳),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등을 배향하는 사우이다. 1578년(선조 11)에 건립되어 기대승의 학덕을 기리고자 위패를 모신 곳으로, 1654년(효종 4)에 조정에서 ‘월봉’이라는 이름을 사액 받았고, 1671년(현종 12)에 박상이 조카 박순과 함께 이향되어 지금까지 배향되고 있다.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절골마을에 있는 봉산재(鳳山齋)는 1919년에 건립된 박상의 재실이다. 그로부터 100년 뒤인 2019년 충주박씨 문간공파 문중에서 봉산재를 중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