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515 |
---|---|
한자 | 龍頭洞遺蹟 |
영어공식명칭 | Yongdu-dong Sites |
이칭/별칭 | 용두동 거상 유적,용두동 용두 유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북구 용두동 265|용두동 산30-1|용두동 산18-1 |
시대 | 선사/청동기,선사/철기,고대/삼국 시대,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 |
집필자 | 이정민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3년 4월 3일~5월 2일 - 용두동 유적 전남대학교박물관에서 지표조사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5년 6월 2일~11월 2일 - 용두동 유적 전남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 조사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7년 1월 22일~2월 10일 - 용두동 유적[용두동 거상유적] 호남문화재연구원 지표조사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4년 12월 30일~2015년 2월 26일 - 용두동 유적[용두동 거상 유적] 호남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5년 6월 15일~26일 - 용두동 유적[용두동 용두유적] 호남문화재연구원 지표조사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7년 6월 5일~10월 18일 - 용두동 유적[용두동 용두 유적] 호남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
현 소재지 | 용두동 유적 - 광주광역시 북구 용두동 265|용두동 산30-1|용두동 산18-1 일대 |
출토 유물 소장처 | 국립광주박물관 - 광주광역시 북구 하서로 110[매곡동 산83-3] |
출토 유물 소장처 | 전남대학교박물관 -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77[용봉동 300] |
성격 | 터 |
[정의]
광주광역시 북구 용두동에 있는 청동기시대부터 근대까지의 유적.
[위치]
광주광역시 북구 용두동 일대는 월각산과 죽지봉에서 서쪽으로 흘러내린 산자락이 점차 낮아지면서 높이 30~70m의 구릉이 넓게 발달하였으며, 서쪽으로는 높이 20m 정도의 넓은 충적 평지가 펼쳐져 있다. 용두동 유적은 높이 53m의 구릉 정상부에서부터 사면에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광주광역시 용두동 유적은 공동주택 신축부지에 속해 '용두동 유적', '용두동 거상 유적', '용두동 용두 유적'의 3개 구역으로 나뉘어 3차례에 걸쳐 지표조사와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1차 '용두동 유적'은 전남대학교박물관에서 2003년 4월 3일부터 5월 2일까지 지표조사와 2005년 6월 2일부터 11월 2일까지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으며, 청동기시대·삼국시대의 집터, 토기 가마,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의 고분, 고려시대의 집터, 고려시대·조선시대의 건물지, 민묘 등이 확인되었고, 여러 면 석기, 밀개, 돌칼, 돌살촉, 발, 달걀 모양의 토기, 옥, 목항아리, 뚜껑접시, 분청사기, 관정, 청동발,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2차 '용두동 거상 유적'은 호남문화재연구원에서 2007년 1월 22일부터 2월 10일까지 지표조사와 2014년 12월 30일부터 2015년 2월 26일까지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으며, 청동기시대와 고려시대·조선시대의 집터, 삼국시대의 분구묘, 고려시대·조선시대의 불을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는 시설, 근대의 독널무덤이 확인되었고, 발, 돌살촉, 돌칼, 돌도끼, 갈판, 석검, 기와, 옹기 등이 출토되었다.
3차 '용두동 용두 유적'은 호남문화재연구원에서 2015년 6월 15일부터 6월 26일까지 지표조사와 2017년 6월 5일부터 2017년 10월 18일까지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으며, 청동기시대의 집터와 구덩이, 삼국시대의 집터, 가마, 구, 구덩이, 조선시대의 집터, 구, 움무덤, 불을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는 시설이 확인되었고, 민무늬토기, 삼각형 돌칼, 타날(打捺)[토기의 몸통을 다지거나 부풀리기 위해 두들개로 두드림.]무늬 토기, 수키와, 청동 숟가락, 분청사기 등이 출토되었다.
[현황]
광주광역시 용두동 유적은 택지개발지구가 조성되면서 유적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으며, 출토된 유물은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소장 및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광주광역시 용두동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근대에 해당하는 다양한 유구와 유물이 확인됨으로써 용두동 일대가 청동기시대에는 주거 공간으로 사용되다가 삼국시대 이후에는 주거 공간과 매장 공간 및 생산 공간으로 사용된 복합 문화 유적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동일한 공간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변화는 사회 변화와 무관하지 않은 것인 만큼 용두동 유적에서 조사된 자료는 선사시대 이래 영산강 유역에서 일어났던 사회 변화를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