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7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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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民主化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은옥 |
[정의]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1945년 8.15광복 이후 일어난 민주화 운동.
[개설]
대한민국 수립 이후 발생한 권위주의 통치에 항거하고, 민주주의 발전을 열망했던 운동을 말한다.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으로는 1960년 4.19 혁명, 1980년 5.18민주화운동, 1987년 6월항쟁이 있다.
[4.19혁명]
이승만을 비롯한 자유당은 부통령 후보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이에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부정부패 척결' 구호를 앞세워 도심에서 시위를 벌였다. 2.28 대구 학생 항의 시위를 접한 광주 학생들은 광주고등학교 정기창·이홍길 등을 중심으로 각 학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궐기할 것을 결의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무산되었다.
3월 15일 선거 결과는 이승만과 이기붕이 압도적인 득표율을 기록하며 자유당의 압승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선거 당일 오후 12시 45분 광주 지역 금남로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한 최초 시위가 일어났으며, 오후 3시 40분경 마산 지역에서도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 시위[3.15의거]가 있었으나 강경 진압을 당하게 되었다. 진압 도중 김주열 열사가 최루탄에 눈을 관통당하며 사망하였고,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시신이 떠오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마산 지역에서는 4월 11일 2차 규탄 시위가 일어났다.
4월 19일 시위는 이전 시위와는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오후 4시 30분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오후 7시경 광주 지역에서는 일부 시위대가 자유당 전라남도당 사무소와 학동파출소를 습격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출하였으며, 중학생들이 시위대에 합류하기 시작하였다. 경찰은 최루탄과 위협사격으로 대응하면서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적인 총격을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금남로2가 일대에서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4월 20일 고등학생들의 시위에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합류하기 시작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5000여 명으로 늘어났고, 이들은 "군대는 학생을 옹호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전진하였다. 경찰과 헌병은 이에 대응하여 최루탄을 쏘며 시위를 저지시키려 하였다. 이후 시위대는 경찰과 군대의 진압 작전에 의해 사직공원과 금남로에서 강제 해산을 당하였다.
4월 26일 오전 10시 20분경 이승만이 국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하였다. 4월 28일 국회에 제출된 대통령 사임서가 즉시 수리되었으며, 헌법 규정에 따라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과도내각을 수립하였다.
4.19혁명은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을 수호하였다는 데 큰 의의가 있으나, 혼란스러운 정국을 틈타 박정희를 중심으로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5.18민주화운동]
신군부의 유신 독재를 막기 위하여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는 1980년 5월 16일 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을 중심으로 한 대학생들이 전라남도청 앞 광장에서 대중 집회를 열고 시위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전국 55개 대학 학생 대표 95명을 연행하였고, 자정을 기준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실시하며 계엄군을 대학교에 주둔시키기 시작하였다. 계엄군들은 곧바로 도서관, 총학생회실 등에서 철야를 하던 학생들을 급습하여 무차별 구타 후 체포하였다.
5월 18일 오전 10시경,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막아 세웠다. 이에 학생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계엄군은 잔혹한 폭력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만류하려던 시민들 또한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시내로 쏟아져 나와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농성을 하기 시작하였다.
5월 19일 오전 10시경, 금남로에 모여든 시민들은 3000명을 넘어 4000여 명까지 불어났으며 계엄군과 대치하였다. 오후 4시경부터는 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5월 20일, 계엄군은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전화를 차단하였다. 오후 6시, 금남로에 버스· 화물차·택시 등으로 구성된 차량 시위대가 출현하였다. 신군부의 언론 통제로 인해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된 보도를 한 광주MBC 방송국은 시민들에 의해 방화되었다.
5월 21일, 시민 대표와 계엄군은 협상을 시도했으나 결렬되었다. 오후 1시 정각, 전라남도청 앞에서 애국가에 맞춰 계엄군의 무차별 발포가 시작되었고,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빌딩 등에서 시민들을 향해 조준사격을 가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오후부터 광주 시민들은 나주, 화순 지역 파출소와 경찰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총을 가져와 무장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시민군이 결성되었다. 오후 7시 30분 시내에서 철수한 계엄군은 광주 외곽 봉쇄 작전을 수행하였다.
5월 22일부터 계엄군에 의해 고립된 광주 시민들은 시민군 대표를 조직해 계엄군과 협상을 시도하였고, 자체적으로 무기를 회수해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는 등 시민자치 기간을 운영하였다.
5월 26일 새벽 5시,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워 광주 시내에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궐기대회를 마친 밤, 전라남도청 안에 최후까지 남은 시민들은 150여 명이었다.
5월 27일 새벽 4시경, 계엄군은 항복을 권유하는 최후통첩을 하였고 1시간의 교전 끝에 항쟁은 진압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은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198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미얀마·홍콩 등 세계 민주화 운동에도 큰 의미를 주고 있다.
[6월항쟁]
1987년 1월 13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에게 연행되어 고문을 받다 1월 14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문으로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사망 원인을 조작하여 발표하였고, 이에 3월 3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 대행진'을 개최하기로 하였다.
3월 3일, 전라남도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금남로 원각사에서 개최 예정이었던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 대행진'에 참가하기 위해 광주 지역의 5군데 변두리에 모여 원각사로 향하였다. 그러나 경찰이 원각사 주변을 차단하고 이들을 저지하자, 일부 재야 단체와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시위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날 밤 금남로 주변에서는 16차례 대치 상태가 이루어졌다.
5월 18일, 5.18민주화운동 추모 행사에서 5.18 유족 700여 명이 금남로에서 시위를 벌였고, 오후 6시경 500여 명의 학생을 비롯한 광주 시민들이 금남로 진출을 시도하며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다.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7월 5일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공식적으로 주도한 국민대회는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22개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광주 지역에서 열린 '고문살인 은폐조작 및 호헌철폐규탄 국민대회'에는 2만여 명이 넘는 광주 시민들이 금남로 진입을 시도하며 30여 차례 시위를 지속하였다.
6월 26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국민평화대행진'을 강행하였다. 전국 34개 도시 4개의 군에서 130여만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에 참여하였다. 광주 시민들은 경찰의 진압 속에서도 5만여 명이 금남로로 향하였다. 이 날의 군중 수는 부산과 함께 전국 최대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6월 29일, 당시 민정당 대선 후보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및 구속자 석방' 등 야당과 재야 세력의 주장을 대폭 수용하고 직선제 형태의 대통령 선거 방식이 포함된 8개 항의 시국 수습방안을 발표하였다.
7월 9일,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진 '고(故) 이한열 군의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 광주 시민들은 오후 2시부터 금남로에 모였고, 오후 6시 30분경에는 전남도청 앞 광장부터 유동삼거리까지 광주 시민들로 가득 찼다. 영정과 시신을 실은 운구 차량은 금남로를 통과하는 데만 40분이 걸렸다.
6월항쟁을 계기로 사회 각 부문 운동이 분화되고 조직화되었다.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 및 농민집회가 진행되었고,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가 결성되었다. 교육 부문에서도 민주화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민주교육추진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가 출범하였고, 7월 11일과 7월 27일 광주에서 모임을 가지는 등 활동을 지속하였다. 민주교육추진전국교사협의회의 초대 회장은 담양고서중학교 교사인 윤영규가 선출되었고, 민주교육추진전국교사협의회를 중심으로 교육 민주화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지역 또한 광주와 전라남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