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0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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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州邑城遺墟 |
영어공식명칭 | Historic Site Gwangju eupseong Walled Tow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광주광역시 동구 광산동 12-2|8-2|8-8~13|9-4|9-10|12-1|12-2|13|110 2|서석동 1002|1003-3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용철 |
건립 시기/일시 | 1378~1379년 - 광주읍성 축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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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 시기/일시 | 1909~1918년 - 광주읍성 일본인들이 헒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6~2007년 - 광주읍성 발굴 조사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4년 4월 13일 - 광주읍성유허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0호 지정 |
소재지 | 광주읍성유허 - 광주광역시 동구 광산동 12-2 |
성격 | 유적지 |
소유자 | 문화체육관광부 |
문화재 지정 번호 |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0호 |
[정의]
광주 지역에 건립된 조선시대의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가 되었던 광주읍성 옛터.
[변천]
1979년에 간행된 『광주시사』에 의하면, 광주읍성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 있었던 1909년부터 1918년 사이에 헐고 도로를 개설하여 신시가지를 조성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위치]
광주광역시 동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충장로, 금남로 일원에 있다.
[내용]
읍성은 적으로부터 고을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성한 성곽이며, 지방행정과 군사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한다. 광주읍성(光州邑城)은 1378~1379년(고려 우왕 4~5)에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고을을 방어하기 위하여 평지에 축성하였으며, 광주의 행정 군사 중심지로서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읍성 내 관아에 머물면서 광주를 관할하였다.
광주읍성의 최초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나 있으며, 영조 시대 홍문관에서 편찬한 『여지도서』, 18세기 중엽 비변사에서 편찬한 『비변사인방안지도』와 그 이후 1776년에 편찬한 『지승』, 1871년 편찬한 『호남읍지』 등 여러 종류의 지도에서 광주읍성의 모습이 정방형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제작한 광주 시가지 지도를 보면 정방형이 아니고 오각형에 가까운 모습의 석축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읍성은 석재로 축조되었고, 둘레 8,253척[약 2,750m], 높이 9척[약 3m]으로 축성된 대형 읍성이었으며, 성문 4개, 우물 100개가 있었고, 연못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광주읍성의 특징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내부 공간에 객사와 동헌, 서헌, 황하루, 월소루, 봉생정, 재명석등(在銘石燈)[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민가가 함께 있었고, 광주읍성 밖에는 제사 시설, 향교, 서낭당, 마을 등이 있었다. 동문 밖 ‘장승 한 쌍’은 현재의 전남대학교 내로 옮겼고, 읍성 남문 밖 진남비(鎭南碑)는 현재의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느티나무 아래, 북쪽 밖을 지키며 수문장 역할을 하는 십신사지석비(十信寺址石碑)는 현재의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광장 내에 서 있다.
1978년 도청 보수공사 당시 발견된 명문(銘文)에는 1437년에 축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 현재 광주공원에 있는 보물인 (전)광주 성거사지 오층석탑(聖居寺址五層石塔), 동구 지산동에 있는 보물인 광주 지산동 오층석탑(芝山洞五層石塔)이 있다.
(전)광주 성거사지 오층석탑과 광주 지산동 오층석탑은 광주광역시 동쪽과 서쪽을 지키고 있는 탑으로 알려져 있으며, 건립 시기는 고려 초와 신라 말로 추정을 하고 성거사지의 복장 유물은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읍성 안의 길은 남북과 동서의 2개의 큰 길로 나누어져 있다. 동서남북의 길 끝에 성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성 내에서 각 성문으로 가는 길을 동문통, 서문통, 남문통, 북문통이라고 하였다. 성문은 동쪽으로 난 문을 서원문(瑞元門), 서쪽으로 난 문을 광리문(光利門), 남쪽으로 난 문을 진남문(鎭南門), 북쪽으로 난 문을 공북문(拱北門)이라 하였다.
광주읍성유허는 처음 발굴 이후 여러 가지 기록을 참고로 하여 1994년 4월 13일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그 이후 충장로 성벽을 이루었던 성돌을 해체하여 보관하였다가 2014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동쪽[광주광역시 동구 광산동 12-2]에 일부 구간을 원형대로 성돌을 쌓아서 옛날의 모습대로 재현하였다. 또 문헌에는 없지만, 광주읍성의 유허 앞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자연 천의 흐름을 이용한 넓이 3~4m 정도의 해자가 있었던 것이 조사되어서 읍성 앞에 사각형 돌로 해자를 재현해 놓았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광주읍성유허는 1992년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부지 정리를 하던 중 성돌과 성벽의 하부를 흙으로 만든 광주읍성의 기초를 발견하였고, 2006~2007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조성하면서 광주읍성의 발굴과 조사가 이루어졌다.
[의의와 평가]
광주읍성은 현재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5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석성으로 복원할 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