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6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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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景陽-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안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40년대 - 경양방죽 1차 매립 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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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0년대 - 경양방죽 2차 매립 공사 |
최초 설립지 | 경양방죽 -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 일대 |
성격 | 저수지 |
[정의]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 일대에 있던 인공 호수.
[건립 경위]
경양방죽의 건립 경위와 실체를 명확히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1902년 6월 9일 자 『황성신문』은 경양방죽이 흉년을 방지할 목적으로 신라 진성여왕 때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광주 지역에 전해진다는 기사를 실었다. 1440년(세종 22) 세종의 농공정책의 일환으로 3년 만에 완공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 역시 확실하지 않다. 한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경양방죽을 지나며 뱃놀이 풍류를 떠올려 시를 짓기도 하였다. 또한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큰 저수지로 ‘광주 경양지’가 언급되었고, 관(官)의 소홀한 관리로 인하여 농사에 이용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경양방죽과 관련된 광주광역시 지역민의 기억과 구술을 통하여 그 연원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변천]
일제강점기인 1912년의 지적원도에 의하면 경양방죽은 면적이 65,418평[216,259㎡]으로 큰 규모의 농업관개시설이었다. 경양방죽의 물은 농업용수로 이용되면서 광주 근교뿐만 아니라 송정리까지 혜택을 주었다. 그러나 1937년 일제는 비밀리에 경양방죽 매립 계획을 세웠다. 당시 조선인들에게 이 계획이 알려지면서 경양방죽 매립 반대 운동이 촉발되었으나, 1940년대에 일제의 주도하에 1차 경양방죽 매립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후 1960년대 주택지 개발을 위한 목적으로 광주시 주도하에 나머지 2차 경양방죽 매립 공사가 진행되었고, 경양방죽 옆에 있던 신안동의 태봉산을 모조리 헐어 조달한 흙으로 경양방죽을 최종 매립하였다. 현재 경양방죽은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졌으며 태봉산 역시 사라졌다.
[현황]
경양방죽은 현재의 광주광역시 동구 무등로 314[계림동 505]를 본번으로 하는 곳에 있었으며, 현재는 대형마트가 들어서 있다. 한편 경양방죽은 광주광역시의 한복판에 있던 자연공간이 식민지적 근대성과 산업근대화를 마주하게 되면서 어떻게 소멸되는가를 보여준다. 최근에는 경양방죽의 건립 경위, 형상, 역사 등 경양방죽에 대한 전문 연구서가 출간되고 있어, 광주광역시의 생활사와 문화 교류 측면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경양방죽에 얽힌 역사적 실체와 기억이 조명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