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5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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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時海忠孝碑 |
영어음역 | Jeong sihae Chunghyobi |
영어의미역 | Monument to Loyalty and Filial Piety of Jeong sihae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하고리 486-3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진돈 |
성격 | 충효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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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비석 |
건립시기/일시 | 일제 강점기 |
관련인물 | 정시해 |
재질 | 화강암 |
높이 | 240㎝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하고리 486-3 |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무송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충효비.
[개설]
의병장 일광(一狂) 정시해[1872~1906]는 면암 최익현의 휘하에서 활동하다 1906년(고종 10) 6월 총탄에 맞아 순국하여 1990년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정시해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낙언(樂彦), 호는 일광(一狂)이다. 전라북도 고창 출신으로 부친은 정종택(鄭鍾澤)이며, 모친은 거창신씨(居昌愼氏)이다. 학문은 기우만과 최익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시해는 1905년 말 시묘(侍墓)를 마치고 하산하자,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일본에 넘어간 것을 개탄하고 집을 떠나 최익현을 찾아갔다. 최익현은 정시해를 격려하여 전라도 지방의 지사를 규합할 것을 명하고 의병 봉기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정시해는 경상도 일대를 누비며 선비들을 찾아 구국책을 모의하고 동지 규합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며 실국광민(失國狂民)이라 자칭하고, 일광(一狂)이라 자호(自號)하였다.
1906년 봄 태인으로 최익현을 찾아가 경상도의 민심 동향과 지사들의 반응을 보고하고 거의모사(擧義謀事)에 참여하였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의병이 함께 봉기할 것을 통고하기 위하여 다시 경상도로 떠나 19일 만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정시해는 6월 5일 최익현 의병대의 소모장 겸 중군장(召募將兼中軍將)으로서 태인을 출발하여 6월 6일에는 순창 구암사(龜巌寺)로 진을 옮기고, 이튿날 순창성 밖에서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고 전열을 정비하여 6월 8일에는 곡성으로 진출하였다.
6월 19일 순창으로 회군하여 포진 중, 6월 20일 일본군과 합세한 전주·남원의 진위대(鎮衛隊)와 충돌하다가 전사하였다. 이에 정시해는 1963년 대통령 표창이,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이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1994년 유해(遺骸)는 고창군 성송면 양사동 안산에서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제307호 유택에 이안(移安)되었다.
[건립경위]
정시해 충효비는 정시해의 애국 충절과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비가 건립되었다.
[위치]
성송면사무소에서 대산 쪽으로 가는 국도 23호선을 타고 계속 직진하면 하고리가 나오는데, 옛 무송현의 자리인 삼태봉의 남쪽이다. 삼태마을 앞쪽에는 하고리 왕버들나무숲이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삼태마을을 바로 지나 도로변 왼쪽에 정시해 충효비가 있다.
[형태]
정시해 충효비는 좌대와 갓석, 그리고 비신을 갖추었고, 주변에는 시멘트로 축을 세운 다음 철망으로 담을 둘렀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의사정시해공충효비(義士鄭時海公忠孝碑)’라고 크게 쓰여 있으며, 음기에는 ‘계묘사월십일(癸卯四月十日)’이라고 각자되어 있다.
[현황]
정시해 충효비와 더불어 고창읍 교촌리에 일광기념관이 있으며, 무장면에는 정시해 추모비가 있다. 일광기념관은 1993년 12월 건립하여 정시해의 영정과 유품 15점, 문건 30점, 일대기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매년 추모 행사를 거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