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7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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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 戊戌銘 塢作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대학로 80[산격동 1370-1]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이영호 |
건립 시기/일시 | 578년 - 대구 무술명 오작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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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1969년 11월 7일 - 대구 무술명 오작비 보물 제516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6월 29일 - 대구 무술명 오작비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보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
현 소재지 | 경북대학교 박물관 - 대구광역시 북구 대학로 80[산격동 1370-1] |
성격 | 비석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03㎝[높이]|65.8㎝[상부 너비]|53.8㎝[하부 너비]|12㎝[두께] |
소유자 | 경북대학교 |
문화재 지정 번호 | 보물 |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비석.
[개설]
대구 무술명 오작비(大邱戊戌銘塢作碑)는 578년 건립된 신라의 비석이다. 1946년 대구사범대학 교수 임창순이 대안동 82-8, 82-9번지 서태균(徐太均)의 집 앞에서 발견하여 대구사범대학에 보관하였다. 6·25전쟁 때 미군이 교정을 수용하면서 7~8년 동안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이후 종합대학인 경북대학교가 출범하면서 대구사범대학 교정이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고등학교 교사로 사용되었다. 1957년 교내 수영장 부근에서 비석이 다시 발견되어 경북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겼다. 1969년 11월 7일 보물 제516호로 지정되었다.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위치]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형태]
대구 무술명 오작비는 적갈색의 자연석으로 상부는 원형으로 처리되고 하부는 대체로 직선으로 잘려 있다. 높이 103㎝, 상부 너비 65.8㎝, 하부 너비 53.8㎝, 두께 12㎝이다. 비면(碑面)은 모두 연마를 하지 않은 자연석 그대로이다. 비의 개석(蓋石)은 본래 없었던 듯하다. 하부의 모습으로 보아, 비는 본래 대석 위에 세웠거나 암반 위를 파고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신 앞면에 비문을 음각하였는데, 전문 9행으로 각 행마다 글자 수가 일정하지 않다. 또한 비신 오른쪽 하부가 일부 파손되었다. 각 행의 글자 수는 많은 곳은 27자, 적은 곳은 8자로 대체로 180여 자로 추정된다. 글자의 크기와 간격이 일치하지 않고, 줄도 비뚤어져 있다. 필치는 소박하고 고졸한 풍을 보이고 있으나, 오랫동안 지상에 노출되어 있었던 탓인지 같은 시기의 다른 비들에 비하여 마멸이 심하다. 따라서 전체 글자 중 50여 자는 판독자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완벽한 해석이 어렵다.
[금석문]
대구 무술명 오작비의 서두 ‘무술년 사월삭 십사일(戊戌年四月朔十四日)’에서 무술년은 비의 형태, 비문의 서체, 비문의 관명과 인명 등으로 보아 578년(신라 진지왕 3)으로 추정된다. 531년(법흥왕 18) 담당 관청에 명하여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다거나, 영천의 청제(菁提)가 536년(법흥왕 23) 무렵에 축조된 것을 보면 6세기경 신라에서는 광범위하게 관개지를 건설하였다고 추정된다. 비문의 “무동리촌 고□오작기지(另冬里村高□塢作記之)"에서 ‘무동리촌’은 오가 있었던 촌락의 이름이고, ‘고□오’는 오의 명칭이다. 오에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보루(堡壘)인 군사상의 제방과 농사를 위한 관개지의 제방이 있었다. 그러나 이 오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관개지일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비문 후반에서 “차오(此塢) 대광(大廣) □보(□步), 고(高) 5보 4척(五步四尺), 장(長) 50보(五十步)”라 하였다. 제방의 길이가 50보인데, 군사상의 보루로 50보의 길이는 너무 짧다. 둘째, 영천 청제비 병진명은 오작비의 비문 형식과 같으며, 청제비 병진명 서두에 ‘□□□□오(□□□□塢)’라 명기되고 있음으로 보아 당시에는 관개지를 ‘오(塢)’라 표기한 것 같다. 따라서 대구의 오(塢)도 영천 청제비 병진명의 그것과 같이 관개지였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순수 한문체가 아니고 이두식(吏讀式) 문체로 되어 있다. 직명·지명·인명 등 고유명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고유명사 중간중간에 몇 구절의 문장이 끼워져 있다. 삼국시대 신라 비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속한문체의 문장이다. 무동리촌, 진득소리촌(珎得所里村), 오진차지촌(塢珎此只村) 등 다수의 촌이 등장한다. 도유나(都唯那)는 승직(僧職)이고 보장(寶藏)과 혜장(慧藏)은 승려 이름이다. 이들의 법명 아래 글자는 각각 아척간(阿尺干)으로 읽어 외위로 파악하여 왔으나 최근에는 ‘사척간([沙]尺干)’과 ‘아니(阿尼)’로 읽어, 오작(塢作) 지역을 도유나의 녹읍으로 보기도 한다. 관등으로는 경위인 [사]척간([沙]尺干)과 외위인 귀간지(貴干支), 일척(一尺), 일벌(一伐) 등이 나타난다.
마지막 “차작기수자(此作起數者) 삼백십이인공부여십삼일(三百十二人功夫如十三日) 요작사지(了作事之)”는 역역 동원과 관련한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이것은 만드는데 일으킨 인원수[동원된 수]는 312인의 공부(功夫)이며, 13일 간에 일을 다 만들었다”고 흔히 이해하여 왔다. 그러나 “이것은 만드는데 일으킨 인원수는 312인이고 노동량으로는 13일과 같이 하여 다 만들었다”고 해석하는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었다. 신설의 경우 공부(功夫)를 단지 ‘인부(人夫)’의 뜻으로 해석하지 않고, 노동량으로 파악하고 있어 주목된다. 말미의 ‘문작인(文作人)’은 '글 지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의의와 평가]
대구 무술명 오작비은 578년(신라 진지왕 3) 무렵 제방 및 수리시설의 발달과 역역 징발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주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