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규[달성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945
한자 禹成圭[達城郡]
영어공식명칭 Woo Seonggyu
이칭/별칭 성석(聖錫),경재(景齋),경도(景陶),경도재(景陶齋)
분야 문화·교육/교육,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봉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30년 - 우성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78년 - 우성규 선공감역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85년 - 우성규 현풍 현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892년 - 우성규 돈령부 도정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905년 - 우성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05년 - 우성규 추모 인산 정사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55년 - 우성규 추모 '경도재 우성규 선생 기적비' 건립
출생지 대구광역시 달성군
성격 관료|학자
성별
본관 단양(丹陽)
대표 관직|경력 현풍 현감

[정의]

개항기 달성 출신의 관료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성석(聖錫), 호는 경재(景齋)·경도(景陶). 단양 우씨 판서공파 파조 우홍명의 손자인 우전의 12세손이며, 아버지는 우진권(禹鎭權)이다.

[활동 사항]

우성규(禹成圭)[1830~1905]는 달성에서 태어났으며, 서울에 올라와 거주하면서 이름난 사람들과 사귀면서 학문을 닦았다. 1865년 흥선 대원군이 만동묘(萬東廟)를 부수어 없애 버릴 것을 명령하자 성균관 유생들과 더불어 반대 상소를 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878년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며, 곧 감조관(監造官)으로 옮겼다. 그 뒤 상의원 주부, 북부령(北部令), 사직령(社稷令), 현풍 현감[1885년]·영덕 현감·예안 현감과 임천 군수·단양 군수를 역임하였다. 1892년 돈녕부 도정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우성규는 경전 공부와 후학 교육에 힘써 많은 제자를 길러 냈다.

[학문과 저술]

우성규의 문집으로 『경재집(景齋集)』 14권 5책이 전한다. 그러나 서문과 발문이 없어 편찬 경위와 간행 연도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목활자본이며, 권1~권2에는 시(詩) 174수, 권3∼권7에는 서(書) 75편, 권8∼권10에는 잡저(雜著) 16편, 권11에는 서(序) 11편, 기(記) 27편, 권12에는 발(跋) 15편, 권13에는 명(銘) 3편, 잠(箴) 5편, 찬(贊) 1편, 전(箋) 1편, 상량문(上梁文) 3편, 축문(祝文) 3편, 제문(祭文) 4편, 묘갈명(墓碣銘) 1편, 행장(行狀) 2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14는 부록으로 박승동(朴昇東)의 행장과 송병순(宋秉珣)의 묘갈명이 수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우성규를 추모하여 후학(後學)들이 1905년 덕동 서원(德洞書院)의 옛 자리에 인산 정사(仁山精舍)를 건립하였다. 뒤뜰에는 1955년에 세운 '경도재 우성규 선생 기적비(景陶齋禹成圭先生紀蹟碑)'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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