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402 |
---|---|
한자 | 夏時贊 |
영어공식명칭 | Ha Sichan |
이칭/별칭 | 경양(景襄),열암(悅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일주 |
출생 시기/일시 | 1750년 - 하시찬 출생 |
---|---|
몰년 시기/일시 | 1828년 - 하시찬 사망 |
출생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거주|이주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수학|강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사당|배향지 | 독무재 - 대구광역시 수성구 화랑로42길 31[만촌동 188-1] |
성격 | 학자 |
성별 | 남성 |
본관 | 달성(達城) |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출신의 학자.
[가계]
하시찬(夏時贊)[1750~1828]의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자는 경양(景襄), 호는 열암(悅菴)이다. 아버지는 하문징(夏文徵)이며, 대도독 하흠(夏欽)의 후손이다.
[활동 사항]
하시찬은 1750년(영조 26) 대구에서 태어났다. 노론 유생의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유달리 독서를 좋아하였다. 열여덟 살 전후부터 20여 년 동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1790년(정조 14)에 당대 최고 예학자 중의 한 사람인 경호(鏡湖) 이의조(李宜朝)를 찾아가 예학에 관하여 질의하였고, 당대 성리학 이론가 중 한 사람인 성담(性潭) 송환기(宋煥基)에게 배우면서 학문을 정립하였다.
하시찬은 1789년에 자신이 건립한 독무암서(獨茂巖棲)에 기거하며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저술과 강학으로 만년을 보내다가 1828년(순조 28)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하시찬의 저술로는 『팔례절요(八禮節要)』 2권과 후손 하정익(夏正益)·하정창(夏正昌)에 의하여 간행된 『열암문집(悅菴文集)』이 있다. 하시찬의 성리학 사상은 『열암문집』의 「성설(性說)」 등을 통해 엿볼 수 있고, 예학 사상은 문집의 「경호 선생에게 의례 문목을 올리다[上鏡湖先生儀禮問目]」·「제자들이 새벽에 문안하는 변[諸子晨謁辨]」와 『팔례절요』를 통하여 그 대강을 알 수 있다.
[상훈과 추모]
하시찬을 추모하기 위하여 제자들과 유림이 독무재(獨茂齋)를 건립하였고, 경내에 장판각(藏板閣)과 경덕사(景德嗣)를 건립하여 향사를 지내고 있다. 독무재는 대구광역시 수성구 화랑로42길 31[만촌동 188-1]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