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8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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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柄斗 |
영어공식명칭 | Lee Byeongdu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일수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이병두 금연상채회 평의원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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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민족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금연상채회 평의원 |
[정의]
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민족운동가.
[개설]
이병두(李柄斗)[?~?]는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활동 사항]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廣文社) 내 문회(文會)는 특별총회를 열어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명칭을 변경하고 국채보상운동을 결의하였다. 1907년 2월 17일 광문사 사장이자 대동광문회 부회장이던 김광제(金光濟), 광문사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대동광문회장 박해령(朴海齡) 등을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위한 조직으로 금연상채회(禁煙償債會)와 대구민의소(大邱民議所)가 설립될 때 이병두는 금연상채회 평의원으로 참가하였다. 또한 금연상채회의 제1회 의손 모금에 1원을 특별 의연하였다.
금연상채회는 수창사에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를 설치하였고, 2월 21일 대구민의소 주최로 서문 밖 북후정에서 국채보상을 위한 군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가 『제국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실리면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