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4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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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安國債報償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정은 |
[정의]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천안 전역에서 전개된 국권 회복 운동.
[역사적 배경]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와 을사늑약을 통해 한반도를 식민지화하기 위해 차관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통감부를 설치해 한국의 묵은 빚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1905년 6월, 200만 원의 빚을 일본에서 멋대로 빌려오기 시작해서 1906년에는 빚이 1300만 원이 되었다. 통감부는 이 돈을 경찰 시설이나 인건비 또는 일본인들을 위한 일에 사용하며 우리 민족을 탄압했다.
[경과]
1907년 2월 대구에서 출판사 광문사(廣文社)를 운영하던 사장 김광제(金光濟)와 부사장 서상돈(徐相敦)이 담배를 끊어 국채를 갚자는 국채 보상 운동을 주장했고 전 국민이 이에 동참하게 되었다. 천안군과 직산군, 목천군에서도 국채 보상 의연금 기성회를 발기하여 1907년 3월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1907년 3월 12일부터 1907년 9월 22일까지 『황성 신문』, 『대한 매일』, 『만세보』, 『대한 매일 신보』 등에 천안과 직산, 목천의 각 마을과 학교, 집안 등 각 단체에서 성금을 모금했다.
[결과]
천안 지역에서 일어난 국채 보상 운동의 모금 결과 천안군에서 1,019명이 102원 12전 5리를 모았고, 직산군에서 2,022명이 223원 75전을 모았으며, 목천군에서는 506명이 199원 78전 5리의 성금을 모았다. 특히 1907년 8월 16일 『대한 매일 신보』에 ‘지령리 야소 교당’의 이름으로 82명의 교인과 마을 사람들이 성금을 모았는데 이 중에서 조인원, 유중권 등은 훗날 3·1운동의 주역이 된 인물이다.
[의의와 평가]
일본의 훼방으로 국채 보상 운동은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일본의 경제적인 침략을 우리의 힘으로 대항하여 우리 경제를 일으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전 국민이 적극적으로 동참한 가운데 천안 지역에서도 여러 집안과 마을, 단체가 국권 회복을 위해 성금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