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10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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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翮 |
이칭/별칭 | 운장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조항덕 |
출생 시기/일시 | 1548년 - 장핵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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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 | 안동 장씨 3세 정려 - 충청남도 천안시 풍세면 가송리 440-1 |
묘소 | 장핵 묘소 - 천안시 풍세면 두지동 |
성격 | 의병장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임진왜란 의병장 |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풍세면 출신의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운장(雲長)이다. 태조 때의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장사길(張思吉)의 후손이다. 고조할아버지는 갑산 군수 장진충(張進忠)이며, 증조 할아버지는 대호군(大護軍) 장득기(張得紀)이고, 할아버지는 내금위장(內禁衛將) 장훈(張訓)이다. 아버지는 부호군(副護軍) 장순경(張舜卿)이다. 아들은 함께 의병에 참가했던 장사일이다.
[활동 사항]
장핵(張翮)[1548~?]은 천안시 풍세면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용력이 있어 동네사람들이 관운장(關雲將)이라 불렀다. 그래서 관례 후에 자를 운장(雲將)이라 하였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니 나이가 35세였다. 수문장[또는 훈련원 정]에 제수받았는데 수년이 되어도 승진하지 못하였다. 1591년(선조 24)에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평택을 지나 소사에 이르러서 왜란이 일어난 것을 알았다. 장핵은 무관의 신분이기에 사직했다 하여 피난길에 나설 수는 없다고 여겼다. 의병을 모집하여 적병을 막기로 하고 아들부터 의병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장핵이 의병을 모아 편제하는 동안 적군은 이미 충주 달천강을 건넜다. 장핵은 죽산, 진천 사이에 방어진을 치고 적과 전투를 벌였다. 싸울 적마다 적병을 무수히 격살하여 큰 전력을 거두었다.
장핵은 의병을 모집할 때 내종사촌 아우 박병을 설득하여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때 늙은 고모가 울며불며 장핵만 믿고 보낸다고 하였다. 수차례의 전투를 거칠 때마다 박병은 앞장서서 적을 격살하였다. 그런데 박병이 적에 포위되어 전사하였다는 전갈이 그에게 날아들었다. 장핵은 박병의 시체라도 거두려고 적진을 헤치고 박병이 전사한 곳까지 갔다. 박병의 시체가 적군 가까이 있어서 한 손으로 적을 막고 한 손으로 쇠갈고리를 던져 박병의 시체를 끌어냈다. 이때 말이 실족하여 넘어졌다. 장핵이 말에서 떨어지는 순간에 적병이 우르르 달려들었으나 용약하여 큰 소리로 위압하니 적은 대항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장핵은 이틈을 타서 다시 말에 올라탔으나 말이 다리를 상하여 가지 못하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이에 적이 우르르 달려들어 장핵을 저격하니 몸에 많은 상처를 입고 전사하였다. 장핵이 전사할 때는 왜군이 침범하고, 1년의 시간이 흐른 계사년 3월 18일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동향인 단옥근이 의병에 참가하여 진중에서 의병 대장 장핵의 전사 장면을 목도하고 돌아와서 증언한 말이다. 지지에 의하면 장핵이 전사했을 때 몸속에 혈서로 쓴 ‘사국(死國)’이라는 휘장이 나왔다고 한다.
장핵의 아들 장사일도 용맹과 기개가 아버지에게 못하지 않았다. 나이 19세에 불과하지만 힘이 장사여서 200근[120㎏]의 돌을 던지는 효용이 있었다. 그 위에 인격이 의젓하여 중망을 모을 만하였다. 장사일은 아버지가 거느리던 남은 병사들을 수습하여 왜적을 소탕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어려운 것은 군량 문제였다. 장사일은 궁리한 끝에 도원수 권율 장군에게 군량을 요청하였다. 이때 장사일은 아버지의 원수요, 나라의 원수인 왜적을 섬멸하지 않고서는 살아있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표하였다. 권율 장군은 장사일이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용기와 기개가 장하므로 군량을 조달해 주라는 허장을 발급하여 주었다. 허장이 있으면 공세창과 지방관이 군량을 주도록 되어 있었다.
[묘소]
장핵의 묘소는 풍세면 두지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임진왜란 후에 지촌 이희조가 천안 군수로 내려와서 장핵 부자의 행적을 듣고 장계를 써서 조정에 올렸다. 지촌의 문서가 전해졌으면 임진왜란 후의 행적도 자세히 알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조정에서는 지촌의 징표를 받고 권율 장군의 허장을 올리라는 하명을 내리었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후라 얼른 허장을 찾지 못하여 은전을 받지 못했다 한다. 장사일의 손자 장인술이 허장을 얼른 찾지 못하여 귀중한 기회를 잃을 번하였다가, 그 후 허장을 찾아 조정에 바쳤다. 그러나 지촌이 이미 전임한 후라 상당히 어려운 절차를 거쳐서 숙종 때 포상이 내려 장핵을 가선대부 병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하고 정문을 내렸다. 정문은 마가산 아래 세웠으니 지금의 천안시 풍세면 가송리에 있다. 정문에는 ‘충신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행통훈대부 훈련원정 장핵지려 숙묘조 병술명정(忠臣贈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行通訓大夫訓練院正張翮之閭肅廟朝丙戌命旌)’이라고 쓰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