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9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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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萬衡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을경 |
출생 시기/일시 | 1897년 2월 17일 - 조만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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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일 - 조만형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83년 12월 29일 - 조만형 사망 |
출생지 | 조만형 출생지 - 충남 천안군 동면 용두리 258번지 |
활동지 | 천안 아우내 장터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병천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3·1 운동 |
[정의]
일제 강점기 천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조만형(趙萬衡)[1897~1983]은 1897년 2월 17일 충청남도 천안군 동면 용두리 258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그 외 가계나 학력 등은 알 수 없고, 1919년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활동 사항]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은 원래 2개의 계열로 나누어 계획되었다. 하나는 수신면(修身面)·성남면(城南面) 민계이며, 이 계통은 수신면(修身面)의 홍일선(洪鎰善)이 발의하였고, 또 하나는 동면(東面)의 조인원(趙仁元)·유관순(柳寬順) 계열로, 조인원의 아들 조병호(趙炳鎬), 유관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 등이 주도하였다. 조만형은 동면계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아우내 장터는 충청북도의 청주·진천, 천안군 내 각 면에서 장꾼이 모이는 곳이었다. 이에 조만형 등은 4월 1일 아우내 장터의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합의한 운동이었다. 조만형 등은 3월 31일 밤 자정에 아우내 장터 중심으로 천안 길목과 수신면 산마루, 진천 고갯마루에 거사를 알리는 횃불을 놓고 이튿날 아침 아우내 장터에 몰려갔다.
오후 1시경 태극기와 ‘대한 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조인원이 군중 앞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는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자, 조만형을 비롯한 군중들은 이에 호응하여 소리 높여 만세를 불렀다. 시장 안은 삽시간에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 동안 군중에게 태극기가 나뉘어졌고 군중은 열을 지어 큰 깃발을 선두로 시장을 누비고 다녔다. 이때 헌병들은 총기를 난사하고 총검을 휘둘러 도합 사망자는 19명, 부상자는 적어도 30명 이상이 발생했다.
오후 4시경 약 40명이 주재소에 몰려가 헌병에게 큰소리를 쳤고, 주전자를 집어 던지고, 유치장 벽에 발길질을 하는 등의 적극적인 항의를 하였다. 군중들은 헌병들의 총부리에 달라붙고 탄약갑을 잡아당기면서 격투를 벌였다. 이때 일제의 무차별적인 발포가 있었고, 김구응 모자 등 다수가 사망하였다.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으로 조만형은 징역 8개월형을 언도받았으나, 미결 기간을 합산하여 9개월 8일의 옥고를 치렀다. 1983년 12월 29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