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951 |
---|---|
한자 | 李旬求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을경 |
출생 시기/일시 | 1892년 12월 28일 - 이순구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일 - 이순구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50년 8월 11일 - 이순구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이순구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이순구 출생지 - 충남 천안군 수신면 발산리 87번지 |
활동지 | 아우내 장터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병천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3.1운동 |
[정의]
일제 강점기 천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이순구(李旬求)[1892-1950]는 1892년 12월 28일 충청남도 천안군 수신면 발산리 87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그 외 가계나 학력 등은 알 수 없고, 1919년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활동 사항]
아우내 장터의 독립 만세 운동은 유관순의 서울 3·1 운동 보고 이래 수신면(修身面)·성남면(城南面) 계, 동면(東面)의 조인원(趙仁元)·유관순(柳寬順) 계로 나뉘어 계획되었다. 이순구는 수민면·성남면 민계로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순구 등은 아우내 장터가 충청북도와 천안군의 장꾼이 모이는 곳이므로, 4월 1일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합의하였다.
4월 1일 이순구는 장터의 출입구를 지키며, 장터로 들어오는 주민들에게 조선 독립 만세를 함께 부르도록 권유하고, 장터를 떠나려는 주민들에게는 되돌아가서 만세를 부르도록 권유하였다. 오후 1시경 조인원(趙仁元)이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자 이순구를 비롯한 군중들도 이에 합세하여 독립 만세를 부르며 장터를 누비면서 행진하였다. 당시 아우내 장터에는 약 3,000여 명의 장꾼이 모여 대대적인 독립 만세운동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이에 헌병과 수비대가 출동하여 총검으로 마구 찌르고 발포하는 등의 만행으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오후 4시경 사망자의 가족과 친지가 시체를 병천 헌병 주재소로 운반해 놓고 항의하였다. 이 때 김교선을 비롯한 한동규·이백하·이순구 등은 약 100명의 집단을 지휘하여 병천 헌병 주재소에 도착하였다. 김교선은 앞장서서 사무실 입구에 버티고 선 채 태극기를 휘두르며 주민들과 함께 독립 만세를 절규하였다. 특히 한동규는 헌병 보조원이 소지한 태극기를 빼앗아 휘두르며 이백하와 함께 솔선하여 병천 헌병 주재소장에게 사망자에 대한 조치를 요구하며 우리도 함께 죽여 달라고 말하였다. 또한 이백하는 유치장의 구금자를 모두 풀어 달라며 대들었고, 이순구는 쇠스랑을 휘둘러 유치장 벽을 때려 부수는 등 과격한 행동으로 군중의 기세를 돋구었다. 이뿐 아니라 김상철은 수차례에 걸쳐 유치장의 벽을 걷어차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마을 주민들은 돌을 던지기도 하고, 철조망을 파괴하기도 하였으며, 소방 기구들도 마구 흩어 놓는 등의 행위로 주재소장인 일본 헌병 오장[小山]에게 항의하였다. 일본군은 여기에 발포로 응수하였다.
결국 이순구는 체포되어 7월 4일 경성 복심 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 받아 불복, 상고하였는데 9월 11일 고등 법원에서 기각하여 옥고를 치렀다. 1950년 8월 11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