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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933
한자 柳重武
이칭/별칭 성관(盛寬),유중용(柳重容)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내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5년 8월 21일연표보기 - 유중무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1일 - 유중무 병천 아우내 장터 독립 만세 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9월 11일 - 유중무 징역 3년형 선고
몰년 시기/일시 1956년 4월 7일연표보기 - 유중무 사망
거주|이주지 유중무 거주지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천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유중무(柳重武)[1875~1956]는 1919년 4월 1일 갈전면(葛田面) 아우내 장터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한 사람 중의 한 명이다.

[가계]

본관은 고흥(高興). 유관순(柳寬順)의 작은아버지이다. 자는 성관(盛寬)이고, 유중용(柳重容)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활동 사항]

유중무는 일찍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교사로 있으면서 천안군 동면 용두리지령리 감리교회를 이끌었다. 1912년 장남 유경석을 공주 영명학교 고등과로, 1914년경 딸 유예도(柳禮道)를 이화 학당으로 유학 보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예도는 23세의 나이로 이화 학당 3학년 졸업반이었다. 이화 학당에서 독립운동에 관계하던 유예도유관순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와 지역의 인사들과 만세 운동을 벌이고자 노력하였고, 이에 유중권(柳重權)·유중무·조인원(趙仁元) 등이 나서서 거사를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1일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奎)·이순구(李旬求)·조인원, 그리고 형인 유중권, 조카 유관순 등이 병천 아우내 장날을 기하여 일으킨 대대적인 독립 만세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 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자, 3천여 명이 운집한 아우내 장터는 대한 독립 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그는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여세를 몰아 시위 군중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할 때에는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열을 이끌었다. 일본 헌병 주재소에서는 시위 대열의 기세에 놀라 총을 난사하였고, 천안에서 불러들인 일본 헌병과 수비대까지 가세하여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둘러대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거나 중태에 빠졌다.

유중무는 일본 헌병의 총에 맞아 빈사 상태에 빠진 형 유중권을 들쳐 업고 주재소로 달려가, 주재소 헌병들을 압박하며 인명 살상에 항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중권 등 19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유중무는 병천 만세 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공주 지방 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며, 7월 4일 경성 복심 법원에서 징역 3년형으로 되어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9월 11일에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유중무의 공훈을 기려 1977년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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