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2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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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興洞脫穀機 |
이칭/별칭 | 천안 탈곡기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물품·도구/물품·도구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대흥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정우 |
생산|제작처 | 신흥 철공소 - 천안시 동남구 대흥동 139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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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농기구 |
재질 | 나무|쇠 |
용도 | 탈곡 |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대흥동 거리의 제작업체에서 제작한 탈곡기.
[개설]
보리나 벼 따위의 이삭에서 낟알을 떨어내는 데 쓰이는 탈곡기는 농업이 주종을 이루던 1970년대까지 농사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쓰이던 농기계였다. 한때 탈곡기 제작 업체가 천안의 대흥동 거리 절반[약 200m]을 차지할 정도로 성업을 이루었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천안 대흥동 탈곡기 거리는 전국 최대 규모의 탈곡기 제작업체가 모여 있던 대규모 단지였다., 1980년대 들어 도시화와 농기계의 자동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반자동 탈곡기의 수요가 밀려나면서 천안 지역 탈곡기 제작 업체가 하나 둘 폐업하였다. 1990년대 들어서는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연원 및 변천]
국제 기계, 대흥 탈곡기 등 대규모 탈곡기 제작 공장들이 천안시 대흥동에 밀집되면서 동력을 이용하는 탈곡기를 주로 만들었다. 손으로 줄기를 붙들고 이삭만 탈곡부에 넣는 수급식, 손 대신에 기계적으로 붙드는 자동 공급식, 줄기도 같이 탈곡부에 넣는 투입식이 있으며, 회전하는 탈곡 급동(急動)의 수도 하나 또는 두 개가 있었다. 인력 탈곡기는 발로 페달을 밟아 급동을 회전시켜 탈곡을 한다. 힘이 많이 들고 탈곡 손실이 클 뿐만 아니라 선별 장치 등이 없는 재래식 탈곡기였다.
충청 내륙 지방의 분기점이면서 사통팔달 교통의 요충지로 각광을 받던 천안시는 농기계 제작 업체의 입지 조건으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또한 일제 강점기 금광으로 이름을 날리던 직산 지역이 인접해 있어 일찍이 천안은 기계 공업 내지 부품 산업이 자리하게 되었다. 이런 배경으로 천안은 농기계 제작 업체가 들어서기에 유리한 곳이었다.
1959년 당시 천안의 공장 현황표에 의하면 동력 탈곡기 제작 업체로 대흥동 139번지 신흥 철공소[대표자 맹규호]와 천흥 기계 주물[대표자 소순만]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콤바인의 보급 증가로 반수동식인 탈곡기는 점차 사용처가 사라지고 이제는 잡곡을 터는 용도나 산간 지역의 소작농에서 그 명맥을 이어갈 뿐이다. 인근 공주시와 당진시에 탈곡기를 제작하는 공장이 남아 있다.
[형태]
1960년대에 그네형, 족답식 탈곡기 형태를 제작하던 대흥동 업체들은 1970년대 들어 동력원에 따라 투입식 탈곡기 형태 제작으로 변모했다. 시스템 상으로는 줄기를 손으로 잡고 이삭 부분을 급동에 대어 탈곡하는 반자동 탈곡기의 형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