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5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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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扶餘龍塘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구룡면 부두로277번길 28[용당리 858-1]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강성복 |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구룡면 용당리에 있는 백제 시대의 공동 우물.
[개설]
부여용당리우물은 백제 시대부터 현대까지 충청남도 부여군 구룡면 용당4리 부두(扶頭)마을의 공동 우물로 사용되었으나 집집마다 샘을 파고 상수도가 설치되면서 우물의 기능은 소멸되었다. 2004년 4월 10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8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변경되었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바뀌었다.
[건립 경위]
부여용당리우물은 예부터 ‘만가대(萬家垈)’ 또는 ‘만가구샘’이라 불리었다. 만 가구가 먹을 만큼 수량이 풍부하여 많은 사람이 우물을 이용하였다는 뜻이다. 구전에 따르면 왕도 부여용당리우물을 마셨을 정도로 물맛이 좋을 뿐 아니라 배가 아플 때 마시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위치]
부여용당리우물은 충청남도 부여군 구룡면 용당리 858-1번지에 있다. 용당리는 구룡천과 금천이 합수되는 넓은 들에 형성된 마을이다. 일찍부터 벼농사가 발달한 곡창 지대로, 마을 동쪽에는 북쪽에서 내려온 백마강의 물줄기가 서쪽을 향하여 흘러간다. 부여용당리우물은 용당4리 부두마을에 있다. 부두마을 명칭은 ‘부여 머리’라는 뜻인데, 바로 길을 건너편에 마주한 규암면 부여두리(夫餘頭里)와 동일한 의미이다. 예부터 부여·홍산·임천 세 고을의 경계였으며, 부여로 가는 들머리가 되는 까닭에 ‘부두’ 또는 ‘부여두리’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 부여 왕씨의 일족인 부여 서씨가 거주한 마을로 전한다.
[형태]
부여용당리우물의 깊이는 5.2m이고, 지상부는 4매의 판석을 우물 정(井) 자 형태로 결구하였다. 석재 한 변의 길이는 약 178㎝, 높이는 41㎝이다. 지하부는 깬돌을 이용하여 지름 약 1m 정도 되게 팔각 또는 원형으로 쌓았다. 석재를 매우 정교하게 다듬어서 축조한 수준 높은 공법을 보여 준다. 1966년 발굴된 부여구아리백제유적과 구조가 흡사하여 당시 유행하였던 백제 우물 양식의 하나로 추정된다.
[현황]
부여용당리우물은 마을 주민들이 신성하게 여긴 우물로 매년 정월 대보름[음력 1월 15일]에 마을의 농악대가 먼저 샘굿을 베푼 뒤 가가호호 지신밟기를 하였고, 우물을 위하는 부녀자들은 유왕제[용왕제]를 지내며 집안이 무탈하기를 빌었다. 또한 최근까지 칠월 칠석날 아침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우물을 깨끗이 청소한 다음 잔을 올렸다. 부여용당리우물은 마을의 공동 우물로 사용하는 과정에서 일부 석재는 보수가 이루어졌다. 현재 우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목재로 제작한 뚜껑을 덮어 놓았으며, 우물 위에 정자를 지어 주변을 조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의의와 평가]
부여용당리우물은 마을 공동체에서 대동샘이 지닌 상징과 의미가 잘 담겨 있으며, 또한 백제 양식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