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6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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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克成 |
영어공식명칭 | Choe Geukseong |
이칭/별칭 | 자인(子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장순순 |
활동 시기/일시 | 1507년 - 최극성 사마시 합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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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16년 - 최극성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20년 - 최극성 사간원 정언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23년 - 최극성 사간원 헌납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24년 - 최극성 사헌부 지평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25년 - 최극성 귀양을 청함 |
출생지 | 최극성 출생지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 |
부임|활동지 | 최극성 부임지 - 충청남도 금산군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전주(全州) |
대표 관직 | 금산군수 |
[정의]
조선 전기 부안 출신의 문신.
[가계]
최극성(崔克成)[?~?]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자인(子仁)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최광지(崔匡之)이고, 할아버지는 최생명(崔生明)이며, 아버지는 성균진사 최수손(崔秀孫), 어머니는 오백형(吳伯亨)의 딸이다. 형제로 최순성(崔順成), 최필성(崔弼成), 최계성(崔繼成)이 있다.
[활동 사항]
최극성은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에서 태어났다. 1507년(중종 2)에 그의 형제 최순성, 최필성, 최계성과 함께 사마시에 합격했으며, 1516년(중종 11)에는 형 최순성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藝文館檢閱 兼 春秋館記事官), 1520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1523년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1524년 사헌부 지평, 한림(翰林),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 등을 지냈고, 외직으로 금산군수(錦山郡守)를 역임하였다. 최극성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났고, 여러 관직을 거치는 동안 청현(淸顯)[청환과 현직]으로 이름이 났으며, 행정에 밝았다. 금산군수에서 퇴임하자 고을에서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최극성을 추모하였다.
『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최극성의 조카 최위지(崔謂之)가 전한 말이라고 하면서, 모친에 대한 최극성의 효행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최극성은 벼슬에 나간 이후에도 “오로지 편하게 봉양하기만을 힘쓰고 벼슬길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의 어머니가 병이 나서,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위중하고 온갖 약이 효과가 없었다. 의원은 제비 고기를 구해서 약으로 쓴다면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 하였으나, 한창 추울 때여서 사방에 눈이 가득하였다. 앉아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엎치락뒤치락 걱정하다가, 밤중에 밖으로 나가 배회하는데, 무엇이 가슴을 치는 것이었다. 최극성이 급히 손으로 더듬어보니 바로 제비였다. 곧 약을 지어 먹였더니 묵은 병이 금방 나았다. 이웃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감탄하여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 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의 형 최필성이 그 아비가 학질(瘧疾)을 앓을 적에 박쥐가 저절로 온 것을 잡아서 효험을 본 일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극성은 또한 1521년(중종 16)에는 사간원 정언으로 있으면서 모친의 병 때문에 정사(呈辭)[벼슬아치가 벼슬을 그만두거나 말미를 받기 위하여 청원서를 내던 일]하고 고향으로 내려간 일이 있고, 1525년(중종 20)에는 늙고 병든 어머니를 위해 귀양(歸養)을 청하니, 국왕 중종은 가까운 고을의 수령으로 최극성을 제수하라고 명하기도 하였다. 이때 금산군수에 제수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