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512
한자 金基鐸妻扶寧金氏烈行碑
이칭/별칭 김기탁 처 부안 김씨 정려,부안 김씨 정려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봉황리 174-1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경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74년연표보기 - 김기탁 처 부령 김씨 열행비 건립
현 소재지 김기탁 처 부령 김씨 열행비 -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봉황리 174-1지도보기
성격 정려비
양식 홑처마|우진각 지붕
관련 인물 김기탁(金基鐸)|김지환(金智煥)
재질 오석
크기(높이, 너비, 두께) 152㎝[높이]|54㎝[너비]|24㎝[두께]
소유자 선산 김씨
관리자 선산 김씨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봉황리에 있는 김기탁의 처 부령 김씨를 기리기 위하여 1974년에 세운 정려각.

[건립 경위]

김기탁의 처 부령 김씨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김시태(金始兌)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효도하고 부모 섬김을 부지런히 하고 우애와 공경을 갖추어 선산 김씨 인재공(忍齋公) 김기탁(金基鐸)에게 출가(出家)하여 화목하게 살았다. 김기탁은 김달상(金達祥)의 후손으로 정절공(靖節公) 김치형(金致亨)의 9세손이다. 김기탁은 잠영(簪纓)[양반이나 지위가 높은 벼슬아치를 말함]의 후예로 문행(文行)이 사림(士林)에 알려졌으며 가정을 잘 다스렸고, 부인 부령 김씨는 남편을 거스르지 않고 도왔다. 그러나 남편의 나이 38세에 병환을 얻어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간병을 하였으나 효험이 없어 위급해지자 하늘에 기도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겨우 3일간 연명하게 하였다.

결국 남편이 운명을 달리하자 죽음을 같이 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어린 두 아들이 울며 말리자 양육할 것을 다짐하면서 단념하고 여자의 몸으로 3년간 정성으로 시묘(侍墓)하여 주위를 감동시켰다. 그 후 열행에 복을 받아 김성흠(金聖飮), 김성서(金聖瑞) 두 아들의 보살핌 속에서 늙도록 효성스런 봉양을 받았다. 정려의 포장에 오르지 못하고 아래로는 사실이 기록되지 않아 후세에 전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김기탁의 5세손인 김지환(金智煥)이 1973년 부령인(扶寧人) 김수철(金水喆)에게 비문을 부탁하여 이듬해인 1974년에 김기탁 처 부령 김씨 열행비(金基鐸妻扶寧金氏烈行碑)와 비각을 세웠다.

[위치]

부안읍에서 동진면 소재지로 직진하면 동진초등학교 앞 자매 수퍼가 나온다. 자매 수퍼 옆 우측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 100m 정도 직진하면 우측에 김기탁 처 부령 김씨 열행비가 있다.

[형태]

김기탁 처 부령 김씨 열행비각은 시멘트 담장으로 사면을 둘렀다. 담장 위로는 철제 난간을 둘렀으며 중앙에 철제문을 달았다. 열행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홑처마, 우진각 지붕이다. 크기는 정면 214㎝, 측면은 166㎝이다. 비각의 기둥은 화강암을 8각으로 다듬은 돌기둥을 세웠으며 사면은 벽을 막지 않았다. 비석은 오석으로 높이 152㎝, 너비 54㎝, 두께 24㎝이다.

[금석문]

앞면에는 ‘인재처사선산김공기탁 배유인부령김씨열행비(忍齋處士善山金公基鐸 配孺人扶寧金氏烈行碑)’라 쓰여져 있으며, 뒷면에는 부령 김씨의 열행 내력과 열행비를 세우게 된 경위가 적혀 있다. 뒷면의 글은 김수철(金水喆)이 지었다.

[현황]

김기탁 처 부령 김씨 열행비각의 옆에는 경재 성재 유허비(敬齋誠齋遺墟碑)가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