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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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佛敎 |
영어공식명칭 | Buddhism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성권 |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에서 석가모니를 교조로 하여 가르침을 따르고, 불경을 경전으로 삼는 종교.
[개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되어 공인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372년이다. 곧이어 백제와 신라에도 불교가 전래되었다. 백제의 불교는 384년(침류왕 원년)에 남중국 동진(東晋)의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전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다음해인 385년에 한강 유역의 도읍인 한산(漢山)에 불사(佛寺)가 최초로 세워지고 백제인 승려 10여 명이 생기게 되었다.
[백제 시대 불교]
충청남도 보령 지역에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여 성행하게 된 정확한 때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삼국 시대 백제의 영역이었던 보령 지역은 성주사(聖住寺)의 전신인 오합사(烏合寺)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어 백제 시대 중요한 사찰이 존재하였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오합사의 창건을 알려주는 기록은 고려 중기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숭암산성주사사적기(崇嚴山聖住寺事蹟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에 통일 신라 시대 한림랑(翰林郞)을 역임하였으며 경주 창림사무구정탑지(昌林寺無垢淨塔誌)를 지었던 김립지(金立之)가 찬한 성주사비(聖住寺碑)에도 오합사 창건에 대한 기록이 있다.
『숭암산성주사사적기』에서는 오합사가 백제 법왕이 창건한 사원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창건 연대가 무왕 때로 언급되고 있어 약간의 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성주사비에 혜왕의 아들로서 법왕을 기록하고 있기에 법왕이 오합사를 창건하기 시작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법왕의 오합사 창건은 위덕왕과 혜왕의 뜻을 이은 법왕이 실질적으로 추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는 북악(北岳)에 오함사(烏含寺)가 설치되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오함사는 오합사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북악은 백제의 5악 중 하나이다. 3산 5악의 성립은 사비(泗沘) 천도 및 도성 축조와 함께 성왕이 추진한 국토 재편 계획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작업으로 알려져 있다. 수도를 지키는 3산과 국토의 사방을 보호하기 위한 5악의 개념은 백제의 경우 성왕 때 완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점을 통해 보았을 때 북악에 건립된 백제 오합사의 창건은 성왕계 왕족들의 불교 활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사비천도를 위해 새롭게 3산 5악을 성립시킨 성왕은 3산 5악에 호국 사찰을 건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성왕이 전사하자 이러한 움직임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위덕왕 때 왕실 원찰(願刹)의 조성이 최대 과제였던 성왕계 왕족들은 혜왕을 거친 법왕 때에 이르러서야 추진할 수 있었다.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기 시작한 법왕이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호국 사찰로서 오합사를 만든 것이다.
한편 655년(의자왕 15년) 오합사에서는 백제 멸망을 예고하는 이변이 벌어졌는데, 호국 사찰이 가지고 있던 예언적 기능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동안 의자왕에 의하여 소외되어 왔던 불교 세력의 비판도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다.
[통일 신라 시대 불교]
통일 신라 중대에 들어와서 오합사는 귀족의 원찰로 바뀌었는데, 690년대 나당 관계의 새로운 변화와 함께 집중적으로 논의된 김인문(金仁問)의 귀국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이때 신라는 나당 관계의 개선을 위한 상징적인 조치로서 당이 김인문에게 봉지(封地)로 주었던 웅천주 지역을 김인문의 식읍(食邑)으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김인문의 사후 신라 중대 왕실은 김인문을 위하여 오합사에 승려를 머물게 함으로써 오합사는 귀족 원찰로 새롭게 자리잡게 되었다.
신라 하대에 들어와 김인문의 후손인 김주원(金周元) 계의 분열과 함께 또 다른 변화를 보였다. 김헌창(金憲昌)의 난의 영향으로 거의 폐사가 되어 방치된 상태였던 오합사는 문성왕과 김양(金陽)에 의하여 낭혜(朗慧)가 주석(住錫)하면서 새롭게 중창되었다. 이것은 백제 유민을 비롯한 지방 세력을 통제하려는 신라 하대 왕실과 자신을 중심으로 무열왕계의 연합을 추구한 김양의 정치적 의도가 결합된 것이었다.
이후 오합사는 문성왕에 의하여 사액(賜額)을 받으면서 성주사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이것은 백제의 호국 사찰이 귀족 원찰에 이어 선종(禪宗) 사원(寺院)으로 바뀌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통일 신라 시대 보령 지역의 불교는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였던 성주산문(聖住山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고려 시대 불교]
고려 시대 보령 지역의 불교는 여전히 성주사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고려 전기에는 성주사뿐만 아니라 보령의 다른 지역에도 중요한 사찰이 건립되었는데, 보령수부리귀부및이수(保寧水芙里龜趺─螭首)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현재 보령수부리귀부및이수는 보령시 웅천읍 수부리 단원사(團圓寺)에 있다. 보령수부리귀부및이수는 탑비의 비신이 남아 있지 않아 탑비의 주인공을 알 수 없다.
귀부와 이수는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碑)와 유사한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보다 간략화되고 형식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점을 통해 보았을 때, 보령수부리귀부및이수는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가 건립되는 975년(광종 26) 이후 고려 전기에 조성된 탑비로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고려 시대 국사나 왕사의 자리에 오른 후 입적한 고승의 경우 승탑과 탑비를 세우는 전통이 있는 점으로 보았을 때, 보령수부리귀부및이수 역시 고려 시대 왕사나 국사를 역임한 고승의 탑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 보령 지역은 성주사가 보령 지역의 중심 사찰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이 밖에 보령 지역에는 중앙에서 왕사나 국사의 지위에 올랐던 고승이 하산소(下山所)로 삼았던 사찰이 존재하였을 만큼 불교가 성행하였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몽골의 침략은 보령 지역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이로 인해 통일 신라 하대 대규모 중창을 시행한 후 고려 전기까지 사세를 유지하였던 성주사는 전쟁의 화마로 소실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에 의하면 화재의 피해를 입은 성주사는 13세기 후반경 바로 재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주사의 중건은 1301년(충렬왕 복위 3)에 삼천불전(三千佛殿)이 이미 조성되어져 있었던 정황으로 보아, 13세기 후반 이전에는 중건 가람이 조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성주사 중건에 참여한 세력으로는 ‘대덕 5년(1301) 박린(朴璘)’이 새겨진 청동(靑銅) 광명대(光明臺)로 유추해 보면 당시 보령 지역의 재지세력(在地勢力)들이 주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재지세력들은 시주(施主)와 같은 경로로 경제적 지원을 하여 성주사의 중건을 도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 불교]
조선은 유교를 건국 이념으로 삼아 세워진 나라이다. 조선은 표면적으로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삼았으나, 숭불의 전통은 조선 시대 내내 지속되었다. 다만 고려 시대와 같이 국가적인 지원이 지속되지 못하고 왕이나 내전의 취향에 따라 불교에 대한 지원이 분절적이었다. 조선 전기의 경우 15세기까지는 일반 백성들뿐만 아니라 왕실 관련 인물들도 적극적으로 불교를 지원하였다. 이러한 지원은 보령금강암석불및비편(保寧金剛庵石佛-碑片)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금강암(金剛庵)은 태종의 후비였던 궁주 권씨(宮主 權氏)의 소원을 빌기 위한 원당(願堂)으로 창건되었다. 사찰은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제자인 영암((玲嵒) 스님이 건립하였으며, 궁주 권씨의 아버지인 영가군(永嘉君) 권홍(權弘)과 궁주 권씨의 딸인 옹주 이씨(翁主 李氏)가 후원하였다. 금강암 비문의 기록을 통해 보령금강암석불및비편이 1412년(태종 12)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 보령 지역에서 불교가 여전히 성행하였다는 점은 대창리 미륵불(大昌里 彌勒佛)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대창리 미륵불은 도포 자락과 같은 복장을 착용하고 있으며, 두 손의 수인(手印) 형태가 15세기 조성된 석불들과 유사한 점을 통해 보았을 때, 15세기경 조성된 조선 전기의 석불입상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의 불교는 15세기까지 왕실과 대중들 사이에 불교가 흥기하였으나, 연산군 때에 들어와 승과가 폐지되는 등 실질적인 폐불(廢佛) 정책이 단행되었다. 따라서 지방에서도 읍성 내의 사찰을 철폐하였으며, 성 밖 먼 거리에 있는 산중 사찰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불교는 국가 지도 이념으로서의 지위는 잃었지만, 신앙의 대상으로 민간 사회에서는 여전히 신봉되었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기록되어 있는 보령현(保寧縣)과 남포현(藍浦縣)의 사암(寺庵)을 보면, 『동국여지승람』에는 숭암사(崇嚴寺), 영흥사(永興寺), 옥계사(玉溪寺), 사나사(舍那寺), 성당사(聖堂寺), 성주사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여지도서』에는 숭암사, 영흥사, 옥계사, 천정사(天井寺) 등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기록에 남아 있는 사찰은 수도 적을 뿐만 아니라 전부가 산지에 있는 사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황]
충청남도 보령 지역에 현존하는 사찰들은 대부분 해방 이후에 건립되어 불교 신도들의 도량이 되고 있다. 보령 지역의 사찰은 1980년대와 1990년대는 30여 곳이 있었으며, 2000년대는 50여 곳으로 늘었다. 2010년대 이후부터는 약 60여 곳 이상으로 증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