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3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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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韓民國臨時政府支援軍資金募集事件 |
이칭/별칭 |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 사건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지방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벌어진 군자금 모집 사건.
[역사적 배경]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후 국내외 곳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이 전개되었다.
[경과]
경상북도 영덕 지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선도한 것은 창수면 출신의 박성운·김덕문·이백이·이필발(李馝發)·김용수(金龍水) 등이다. 1920년 12월 19일 박성운·이백이·김기학 등이 영덕군 창수면 인량동[인량리]의 부호(富豪) 신세희(申世熙)를 방문하여 임시정부 출장원이라고 밝히고 200원을 모금하였다. 그리고 같은 마을의 부호 김상락(金相洛)을 방문하였으나 집에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2월 21일 박성운·김기학 등은 영해면 원구동[원구리] 부호 박세찬(朴世燦)·남붕진(南鵬鎭)을 방문하여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또한 12월 하순부터 1921년 2월까지 경상북도 울진군 온정면·평해면, 영덕군 창수면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한편, 영해면 원구동의 박재광(朴載光)과 병곡면 송천동[송천리]의 권헌문(權憲文)은 1920년 음력 3월과 9월에 각각 흠치교 신자가 되어 포교 활동을 하였다. 박재광과 권헌문은 1924년에 흠치교의 힘으로 독립할 것이라고 선전하면서 자금 모집 및 교인 증대를 위한 활동을 벌였다. 오보면 태부동[지금의 영덕읍 대부리]의 권영기(權寧畿)·권영구(權寧九)·권영도(權寧燾)·김성술(金聖述)·정원술(鄭元述), 오보동[지금의 영덕읍 오보리]의 전명조(全命祚), 달산면 매일동[매일리]의 유경찬(柳景燦)·이우석(李雨錫), 용평동[용평리]의 이유복(李有福), 지품면 지품동[지품리]의 김삼술(金三述), 신양동[신양리]의 남재정(南在晶), 창수면 미곡동[미곡리]의 신명주(申命柱) 등도 1920년 음력 3월부터 9월까지 각각 흠치교에 가입하여 교도의 모집 및 독립자금 징수에 참여하였다.
[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선도했던 김덕문·이필발·김기학 세 사람은 1921년 2월 6일 인량동의 신세희·김상락을 재차 방문하여 군자금을 모금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에게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1921년 3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박성운은 징역 8년, 김덕문은 징역 7년, 이백이는 징역 3년, 이필발은 징역 2년 6월 등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영덕의 흠치교도도 개별적으로 체포되었다. 박재광과 권헌문은 1921년 4월 22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각각 징역 2년과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5월 16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는 권영기·권영구·전명조가 징역 2년을 받았고, 나머지 권영도 등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1921년 11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권헌문·김성술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권영구 등은 면소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의의와 평가]
경상북도 영덕 지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군자금 모집 활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영덕 지역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국외로 망명한 민족 지사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국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