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8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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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民始 |
이칭/별칭 | 회숙(會叔),충헌(忠獻)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창래 |
출생 시기/일시 | 1745년 - 정민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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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73년 - 증광문과 병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74년 - 홍문관 수찬 |
활동 시기/일시 | 1775년 - 세자시강원 필선 |
활동 시기/일시 | 1776년 - 낭청, 승정원 동부승지, 호조 참의, 성균관 대사성, |
활동 시기/일시 | 1777년 - 이조 참의, 비변사 부제조, 좌부승지, 이조 참의, 홍문관 부제학 |
활동 시기/일시 | 1778년 - 도총부 부총관, 비변사 제조, 규장각 직제학 |
활동 시기/일시 | 1779년 - 선혜청 제조, 사헌부 대사헌, 이조 참판 |
활동 시기/일시 | 1780년 - 동지경연사, 성균관 대사성, 이조 판서, |
활동 시기/일시 | 1781년 - 선혜청 제조, 호조 참판, 직제학, 예조 판서, 호조 판서 |
활동 시기/일시 | 1782년 - 의정부 우참찬, 형조 판서, 홍문관 제학 |
활동 시기/일시 | 1783년 - 홍문관 제학, 의정부 좌참찬, 예문관 제학 |
활동 시기/일시 | 1784년 - 평안도 관찰사, 우부빈객 |
활동 시기/일시 | 1785년 - 예조 판서, 세자좌부빈객, 병조 판서 |
활동 시기/일시 | 1787년 - 홍문관 제학 |
활동 시기/일시 | 1789년 - 판의금부사, 교동 수사, 형조 판서 |
활동 시기/일시 | 1790년 - 예문관 제학, 전라도 관찰사 |
활동 시기/일시 | 1792년 - 이조 판서, 수어사 |
활동 시기/일시 | 1793년 - 선혜청 제조 겸 예문관 제학 |
활동 시기/일시 | 1796년 - 규장각 제학, 한성부 판윤 |
활동 시기/일시 | 1798년 - 홍문관 제학, 공조 판서 |
활동 시기/일시 | 1799년 - 의정부 좌참찬, 금위 대장 |
몰년 시기/일시 | 1800년 - 정민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00년 - 시호를 받음, 우의정에 추증됨 |
추모 시기/일시 | 1806년 - 복관, 우의정에 재추증됨 |
추모 시기/일시 | 1807년 - 정와정공민시지장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826년 - 묘표 건립 |
묘소|단소 | 온양 정씨 묘역 - 경기도 양주시 고덕로 108-60 산92 시장골[산북동 1] |
지장비 | 정와정공민시지장비 - 경기도 양주시 고덕로 108-60 산88[산북동 1] |
성격 | 문관 |
성별 | 남 |
본관 | 온양 |
대표 관직 | 의정부 좌참찬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회숙(會叔). 우의정 온양부원군(溫陽府院君) 정순붕(鄭順朋)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정수곤(鄭壽崑)이고, 할아버지는 정광겸(鄭光謙)이며, 아버지는 청도 군수 정창유(鄭昌兪)이다. 어머니는 이산보(李山輔)의 딸이다. 정민시(鄭民始)[1745~1800]는 어려서 작은아버지 정창사(鄭昌師)에게 입양되었다. 아들은 정성우(鄭性愚)이다.
[활동 사항]
정민시는 1773년(영조 4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74년(영조 50)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고, 1775년(영조 51) 당진 등 여러 고을의 곡부(穀簿)를 조사하였으며 세자시강원 필선을 맡아 세손인 이산(李祘)[정조]을 가르쳤다. 1776년(영조 52) 낭청, 같은 해 정조 즉위 후 승정원 동부승지, 호조 참의, 성균관 대사성, 찬집청 당상(撰集廳堂上), 이조 참의를 지냈다.
1777년(정조 1)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의, 비변사 부제조, 좌부 승지, 이조 참의, 홍문관 부제학, 1778년(정조 2) 도총부 부총관, 비변사 제조, 규장각 직제학, 1779년(정조 3) 선혜청 제조, 부사직, 사헌부 대사헌, 이조 참판, 선혜청 당상, 1780년(정조 4) 동지경연사,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판, 이조판서, 이조 참판, 수어사, 이조 참판, 성균관 대사성, 1781년(정조 5) 선혜청 제조, 호조 참판, 직제학, 이조 참판, 예조판서·호조 판서·이조판서를 두루 거쳤다.
1782년(정조 6) 의정부 우참찬, 형조판서, 홍문관 제학, 형조판서·예조판서, 선혜청 당상, 1783년(정조 7) 홍문관 제학, 가상존호도감 제조, 의정부 좌참찬, 형조판서·공조 판서·예문관 제학, 지경연사, 1784년(정조 8) 평안도 관찰사, 우부빈객, 1785년(정조 9) 예조판서, 세자 좌부빈객, 병조판서, 1786년(정조 10) 함경도 관찰사, 선혜청 제조, 지경연사, 1787년(정조 11) 홍문관 제학, 1789년(정조 13) 판의금부사, 교동 수사(喬桐水使), 형조판서, 1790년(정조 14) 예문관 제학, 형조판서, 규장각 제학, 호조 판서 겸 예문관 제학 겸 장용영 제조를 거쳐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다.
1792년(정조 16) 이조판서, 수어사(守禦使), 1793년(정조 17) 장용영 제조, 좌참찬과 우참찬, 총융사, 진휼청 당상, 동지성균관사, 선혜청 제조 겸 예문관 제학에 제수되었다. 1796년(정조 20) 규장각 제학, 한성부 판윤, 의정부 좌참찬, 겸 장용위 대장, 판의금부사, 이듬해 이조판서·공조 판서 겸 장용영 제조, 1798년(정조 22) 홍문관 제학·예문관 제학·공조 판서, 1799년(정조 23) 의정부 좌참찬, 금위 대장, 형조판서·공조 판서, 의정부 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정민시는 정조 즉위 후 홍국영(洪國榮)과 함께 측근으로 발탁되어 높은 벼슬을 두루 거쳤으나 끝까지 분수를 지켜 임금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하여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할 때 사리사욕을 채웠다는 죄목으로 삭탈관직되었다. 1806년 아들 정성우의 상소로 복관되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태학지경시(太學志慶詩)』가 있다. 이는 1790년(정조 14) 9월 29일 왕세자 탄생 100일을 맞아 생원, 진사 98명과 유학 15명이 성균관의 별당인 비천당(丕闡堂)에 모여 지경연(志慶宴)을 베풀면서 김수항(金壽恒)의 지희운(志喜韻)을 따서 각기 시를 짓고 화답한 것을 모아서 엮은 것이다.
[묘소]
정민시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산북동 온양 정씨 묘역에 있다. 정경부인 완산 이씨와 합장묘로, 16기의 봉분을 지나 구릉 위쪽에 자리하며, 북동쪽을 향하고 있다. 비문은 조카인 이조판서 정상우(鄭尙愚)가 근표(謹表)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정민시가 죽자 임금은 시장(諡狀)을 거치지 않고 친히 시호를 내리면서 우의정에 추증하고, 나라에서 장례를 치러 주도록 하였다. 또 정민시의 지장비에 새길 글을 하사하였다. 비문은 정조가 1800년 6월 승하함에 따라 임금의 말을 집자(集子)한 것이다.
‘신제학정민시출안호남(贐提學鄭民始出按湖南)’이라고 적힌 정조 어필 서축(書軸)[글씨를 쓴 족자]도 하사받았다. 이것은 1791년(정조 15) 2월 정민시가 호남으로 부임할 때 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