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848 |
---|---|
한자 | 鄭大年 |
이칭/별칭 | 경로(景老),사암(思菴),충정(忠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창래 |
출생 시기/일시 | 1503년 - 정대년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531년 - 사마시 생원 3등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32년 - 별시문과 장원 |
활동 시기/일시 | 1535년 - 지평 |
활동 시기/일시 | 1542년 - 감찰, 정조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옴 |
활동 시기/일시 | 1544년 - 승정원 도승지 |
활동 시기/일시 | 1546년 - 황해도 관찰사 |
활동 시기/일시 | 1547년 - 첨지중추부사, 형조 참의 |
활동 시기/일시 | 1549년 - 병조 참의 |
활동 시기/일시 | 1551년 - 공조 참의 |
활동 시기/일시 | 1552년 - 승정원 도승지, 한성부 우윤 |
활동 시기/일시 | 1553년 - 경기도 관찰사 |
활동 시기/일시 | 1555년 - 호조 참판, 사헌부 대사헌, 대호군 |
활동 시기/일시 | 1556년 - 광주 목사 |
활동 시기/일시 | 1557년 - 한성부 좌윤·한성부 우윤·한성부 좌윤, |
활동 시기/일시 | 1561년 - 상호군 |
활동 시기/일시 | 1566년 - 사헌부 대사헌 |
활동 시기/일시 | 1567년 - 형조 참판, 병조 참판 |
활동 시기/일시 | 1568년 - 호조 판서 |
활동 시기/일시 | 1572년 - 우찬성, 우의정 |
활동 시기/일시 | 1575년 - 이조 판서 |
몰년 시기/일시 | 1578년 - 정대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578년 - 묘갈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613년 - 정대년 추모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640년 - 정대년 신도비 건립 |
부임|활동지 | 양주 -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
묘소|단소 | 묘소 -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송삼로 72-8[원부리 오미마을] |
묘소|단소 | 묘갈 -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송삼로 72-8[원부리 오미마을] |
선정비 |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양주 관아지 |
신도비 |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송삼로 72-8[원부리 오미마을]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동래 |
대표 관직 | 우의정 |
[정의]
양주목사를 지낸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할아버지는 사직(司直) 정형운(鄭亨耘)이고, 아버지는 예문관 대교(藝文館待敎) 정전(鄭荃)이다. 어머니는 거창 신씨(居昌愼氏)로 이조판서에 증직된 신극정(愼克正)의 딸이다. 부인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종묘서령(宗廟署令) 이인홍(李仁弘)의 딸이다. 아들은 여산 군수 정휴복(鄭休復)이며, 손자는 정호(鄭灝), 증손자는 정양우(鄭良佑)와 충청도 관찰사 정양필(鄭良弼)이다.
[활동 사항]
정대년(鄭大年)[1503~1578]은 1531년(중종 26)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예빈시 주부를 거쳐 1535년(중종 30) 지평, 장령, 부교리, 집의, 직제학 등을 지냈으며, 1542년(중종 37) 감찰로서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44년(인종 즉위년) 승정원 도승지, 1546년(명종 1)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1547년(명종 2) 첨지중추부사, 형조 참의, 1549년(명종 4) 병조 참의, 1551년(명종 6) 공조 참의, 이듬해 승정원 도승지, 한성부 우윤, 1553년(명종 8) 경기도 관찰사, 1555년(명종 10) 호조 참판, 사헌부 대사헌, 대호군을 거쳐 1556년(명종 11) 광주 목사로 나갔다.
1557년(명종 12) 한성부 좌윤·한성부 우윤·한성부 좌윤, 1561년(명종 16) 상호군, 1566년(명종 21) 사헌부 대사헌, 1567년(명종 22) 형조 참판, 같은 해 선조 즉위 후 병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1568년 호조 판서, 1572년(선조 5) 우찬성, 우의정이 되고 1575년(선조 8)에 이조판서에 올랐다. 3년 뒤인 1578년에 세상을 떠났다.
정대년은 유능한 관료에 청백리였다. 선조 재위 초 육조의 장을 추천하라는 왕명이 떨어지자 모든 관료가 정대년을 추천할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정대년은 단정한 외관에 성품이 너그럽고 생활이 검소하였으며 직무에 충실하였다. 또한 지혜롭고 식견이 뛰어나 어렵고 번거로운 업무도 척척 해냈다.
정대년은 네 명의 임금을 모시면서 오래도록 벼슬을 하였으나 세력을 잡은 권신들에게 잘 보이려고 아첨을 하거나 빌붙은 적이 없었다. 두 번의 이조판서를 지내면서는 당대의 명경(名卿)[이름난 정승]으로 불리었다. 임금이 권신 윤원형(尹元衡)이 첩을 정부인(正夫人)으로 삼게 된 연유를 밝히라고 명하여 이를 조사하던 중 윤원형이 뇌물을 쓰자 완강히 거절하였다. 이에 주변 사람들은 정대년이 보복을 당할까 걱정하였다고 한다.
[묘소]
정대년의 무덤은 경기도 성남시에 있었으나 1986년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원부리 오미마을 동래 정씨 세장지로 옮겼다. 선조 대의 명필인 김현성(金玄成)이 묘갈을 썼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1613년에 양주목사를 지낸 정대년의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이 정대년 추모비는 다른 양주목사 송덕비들과 함께 세워져 있다. 동래 정씨 사암공파 묘역 아래 혁림사(赫臨祠) 경내 비각에는 1640년(인조 18)에 세워진 정대년 신도비[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148호]가 있다. 이 신도비는 손자 정호가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의 비문을 받아 세우려 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가 증손자인 정양우, 정양필 형제가 병조 참판 오준(吳竣)의 글씨와 홍문관 부제학 김광현(金光炫)이 쓴 두전(頭篆)을 받아 세웠다. 비의 뒷면에는 이러한 건립 배경과 자손 170명의 명단을 기록한 추기가 있다. 추기는 증손자 정양필이 적고, 예조 정랑 유시영(柳時英)이 글씨를 썼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
2017.12.18 | [가계] 수정 | 전주 이씨(全州李氏) -> 상산 이씨(商山李氏) |
2017.12.12 | [가계] 일부 수정 | [변경 전] 부인은 상산 이씨(商山李氏)로 병조 참판 이인홍(李仁弘)의 딸이다. [변경 후] 부인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종묘서령(宗廟署令) 이인홍(李仁弘)의 딸이다. |
2014.12.04 | 이칭별칭 수정 | <변경 전> 이칭별칭 사암(思庵) <변경 후> 이칭별칭 사암(思菴) |
2014.06.18 | [가계] 수정 | <변경 전> 아버지는 예문관 대교(藝文館待敎) 정전(鄭筌)이다. <변경 후> 아버지는 예문관 대교(藝文館待敎) 정전(鄭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