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3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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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加業橋 |
이칭/별칭 | 가래비다리,추교,가납교 |
분야 | 지리/인문 지리,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지명/도로와 교량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학수 |
비정 지역 | 가업교 -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 70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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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고지명|다리 |
관련 문헌 | 『여지도서』 |
[정의]
조선 후기 경기도 양주목 광석면[현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에 있던 다리.
[명칭 유래]
가업교라는 명칭은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처음 등장한다. 가업교는 가래나무[추자목(楸子木)]가 많은 마을에서 그 나무를 이용해 만든 다리로 추측된다. 조선 후기에 가래비 혹은 가라비(加羅非)는 백석면[현 백석읍 가업리] 쪽에도 있었지만 『1872년 지방지도』 등에 등장하는 가라비는 가래비장터를 뜻하는 추교장(楸橋場)이나 추교리(楸橋里)의 예에서 보듯이 주로 광석면 쪽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특히 『여지도서』에 가업교는 당시 관아가 있던 읍내면으로부터 북서쪽에 있는 광석면의 초촌천 상류[혹은 신천(莘川)]에 있다고 했으므로 그 위치는 『양주 땅이름의 역사』에서 고증한 바와 같이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 709-4번지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형성 및 변천]
조선 후기 광석면에 있었던 가업교는 양주목의 치소가 있던 불곡산 남쪽의 읍내면 관아에서 서쪽으로 약 10리[4㎞] 떨어진 곳[현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 일대]에 있었다. 조선 중기 이후 가업교는 양주 읍내와 읍내 북서쪽에 위치한 광석면을 이어주는 중요한 다리였을 것이다. 현재도 양주 관아지에서 북서쪽 광적면 가납리 쪽으로는 국도 360호선이 나 있는데, 가래비와의 원활한 왕래를 위해 신천[예전의 초촌천]에는 가납교가 놓여 있다.
양주 읍내와 광석면의 가래비 방면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였을 것으로 여겨져 가업교는 가래비다리 혹은 추교로 불렸을 것이다. 19세기 중반에 간행된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서의 가납교(嘉納橋)는 이 가래비다리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자료에 등장하는 가업교는 가래나무로 만든 다리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실물은 남아 있지 않다. 가업교가 있던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 709-4번지에는 현재 승리교가 놓여 있고, 그 남서쪽 직선거리 약 500m 떨어진 곳에는 가납교가 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조선 후기 『여지도서』에 처음 등장하는 양주목의 가업교는 오늘날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 709-4번지 일대에 있었다. 19세기 중반의 『동국여지지』에 보이는 가납교는 조선 후기의 가업교를 달리 부르던 이름이거나 그 자리에 새로 만든 다리 이름으로 추정되며, 현재의 가납교는 국도 360호선과 국도 371호선을 잇기 위해 새로 만든 다리이다.
[관련 기록]
『여지도서』 경기도 양주목 교량(橋梁)에 “가업교는 광석면 초촌천 상류에 있다[加業橋 在廣石面哨村川上流]”고 표기되어 있다. 『여지도서』 경기도 양주목 산천(山川)에는 “초촌천은 청송면(靑松面)에 있으며, 불국산(佛國山)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광석면 가업교 아래를 지나 적성의 상수(湘水)와 합쳐지고, 또 진답의 세천(洗川)과 합하여 북쪽으로 흘러 대탄(大灘)이 된다[哨村川 在靑松面 源出佛國山 西過廣石面加業橋下 合積城湘水 又合陳畓洗川北流爲大灘]”고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