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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쌀 한 되와 좁쌀 한 주발로 결혼생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E020201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두천리
집필자 신상구

20여년 동안 울진과 샛재 그리고 봉화를 지나면서 도부꾼을 한 이복록은 울진에서도 유일하게 현재에도 도부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보부상과 선질꾼에 이어 생계를 위해서 등장한 도부꾼은 1970년대 울진과 봉화를 도보 또는 버스를 타고 연결하며 다양한 상품들을 판 사람들로 주로 여자들이 담당하였다. 태어난 곳은 울진읍 대흥리 밤나무골에서 7남2녀의 장녀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어려운 시절 한 달 동안 야학을 다닌 덕분에 간단한 셈과 한글은 배웠지만 이후 학교의 문턱을 가 본적은 없다. 배움은 여기서 끝났다. 학교를 다닌 것도 ‘황국신민서사’라는 것을 외우지 못하면 차도 타지 못하기 때문에 야학을 다니면서 배웠고 덕분에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부모님 밑에서 가사를 도우면서 생활하던 중 중매가 들어왔다. 당시 나이 19살이었는데 16살이 더 많은 사람이었고 울진읍 고성리에서 거주하였다. 19살에 16년이나 나이 차이가 있는 남편을 만나 결혼한 그녀는 울진읍 내에서 살림살이를 시작하였다. 보리쌀 한 되와 좁쌀 한 주발, 삐루병(맥주병)에 간장 한 병을 담고 뚝배기에 장을 퍼 담아 주는 것이 신혼살림의 다였다. 그리고 그 보리쌀은 그날 남편과 밥을 해서 먹고 나니 바닥이 보이는 말 그대로 힘든 생활의 시작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 친정으로 돌아가 먹고 살길이 없으니 곡식을 좀 달라고 하였다. 그렇게 받은 것은 좁쌀 1말과 쌀 2되였다. 친정은 농사라도 짓고 있었으니 먹을 것이 없는 우리에 비해서 형편은 나았다. 당시 비빌 언덕은 그곳밖에 없었다. 남편은 산판(나무를 내는 일)을 하였지만 워낙 술을 좋아하고 친구들을 좋아하여 집에 돈이 모일 틈이 없었다. 모이는 돈은 모두 외상으로 마신 술값으로 날려야 했고, 당최 집으로 가져오는 돈이 없었다. 살림살이는 항시 쪼들렸고 어린 새댁이라고 얌전하게 앉아서 놀 수 없었다. 이집 저집을 다니며 일거리를 찾아 헤맸다.

24살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큰딸과 작은 딸을 낳았다. 돈이 없던 시절 당시 살던 웅기골은 주변에 인가가 없는 독가촌이었다. 사람이 죽어 나가도 모를 정도로 후미진 이곳에서 산으로 둘러싸여 위로는 손바닥만한 하늘이 보이는 곳이었다. 그렇게 산속에서 4~5년을 버티고 생활하였다. 빨갱이들(북한군)을 피해서 어린 딸들을 업고 수십 리 산길을 걸어서 피난을 가기도 하였고, 피난간 곳에는 구걸하며 밥과 김치를 얻어먹고 그렇게 목숨을 연명하였다.

어렵게 생활하던 중 남편은 광산에 취직하였다. 그래도 이때가 가장 생활하기 좋은 날이었을 것이다. 금장광산에 다니면서 남편은 한 달에 한번씩 간조날(월급날)에 큰 도시락통에 돈뭉치를 가득 담아서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착실하게 돈을 모아 기름진 논 다섯마지기를 샀지만, 사람 좋은 남편은 어렵다는 시동생에게 선뜻 그것을 내어주었다.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생활이 막막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금장광산을 그만두고 시동생과 함께 건설업을 했던 남편은 또 다시 술에 돈을 붓고 집으로는 돈 한 푼 가져오지 않는 날이 반복되었다. 다시 팔을 걷어 올리고, 시장판에서 오징어와 과일을 팔면서 생계를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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