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1306
한자 歷史書-順天
영어공식명칭 Suncheon that were identified by the history books
영어음역 Suncheon that were identified by the history books
영어공식명칭 Suncheon that were identified by the history books
분야 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욱

[정의]

순천만의 역사를 담은 『승평지』『강남악부』의 내용과 의미.

[개설]

어느 지역에나 그 지역만의 역사서는 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내밀한 이야기를 담고 있거나 자칫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만한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책들이다. 얼핏 보기엔 사소한 내용일 수 있으나 그 지역에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아온 사람들에겐 어떤 자료보다 소중한 가치를 지닌 책이다. 전라남도 순천시에도 그런 책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승평지(昇平誌)』『강남악부(江南樂府)』가 특히 그렇다.

[순천만을 위한 책 하나, 승평지]

『승평지』는 1618년(광해군 10) 당시 순천부사였던 이수광(李睟光)이 편찬한 읍지이다. 『승평지』를 간행할 당시 이와 비슷한 성격의 읍지들이 많이 편찬되었다. 그것은 사림의 성장과 관련이 있었다. 16세기 이후 몇 차례 사화를 거치면서 등장한 사림 세력들은 도학 정치를 지방통치에 구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통치의 기본 자료인 호구, 전결, 조세 등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했다. 이와 함께 자기 지역의 고유한 문화를 정리함으로써 지역민의 자긍심과 문화 의식을 고조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승평지』 역시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 때문에 『승평지』에는 순천 지역의 색채, 그것도 임진왜란의 전화가 채 가시지 않은 순천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승평지』는 순천 사람들에게 소중한 자료이다.

이수광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린 순천 관련 기사가 너무 소략해서 아쉬워했다. 그리고 자료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소략한 내용만 실렸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순천의 역사는 영영 사라질 수도 있었다. 순천부사 이수광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이러한 상황을 막고자 하였다. 자료가 없다면 발로 걷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수광은 자신이 직접 순천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또 직접 관찰하면서 『동국여지승람』의 미비한 점을 보완하였다. 직접 송현과 오동도를 갔다 와서는 송현에 대해 ‘경치가 매우 기이하고 빼어나다.’라고 서술하였다. 오동도에서는, ‘바위가 있어 노닐며 관람할 수 있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이수광이 직접 그곳을 답사한 소회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순천 지역 산천에 대한 기록의 소략함은 자신이 직접 다양한 시문을 저술함으로써 보완하고자 하였다. 그는 순천을 답사하면서 환선정, 충민사, 객사와 동헌, 망해대, 부유현, 선천원, 낙수역, 쌍암, 송현 등 역사적 유래가 있는 곳이나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시로 남겼다. 그리고 그것을 『승평지』에 실었다. 이는 당대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후대 사람들에게는 순천의 역사나 자연을 알리는 기록문화가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신의 견문과 함께 『승평지』 말미에 자신의 저작을 실었던 것이다.

이수광『승평지』를 통해 순천 지역 백성들의 풍속을 알고 싶은 이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하였다. 백성들의 풍속을 알고 싶은 이는 누구보다 순천부사일 가능성이 컸다. 결국, 이수광『승평지』를 편찬한 것은 후임 수령들의 지방통치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데 있었다.

순천은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 세력이 끝까지 주둔했던 곳이다. 그만큼 임진왜란이 순천의 경제에 끼친 영향은 막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종 부세 상납을 책임지고 있는 수령에게는 무엇보다 지방 경제 사정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필요했다. 순천부사로 부임한 이수광은 이를 절감했을 것으로 보인다. 효율적인 지방행정,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민생 안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순천의 경제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필요했다. 『승평지』를 편찬한 데는 바로 이러한 사정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순천부 입지의 취약한 지점을 간파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역설하고 있다. 『승평지』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백제의 감평군이다. 〈아마 지형이 낮게 꺼져 평평하게 펼쳐서 감평이라 이름한 것 같다.〉”〈강조〉된 부분은 이수광이 보완한 부분이다. 순천의 옛 이름에서 순천의 지세가 낮아 수재에 대비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또 이런 내용도 나온다. “순천부의 거주지는 지세가 평평하고 양옆으로 시내가 흘러 물난리가 염려스럽다.” 제언 수축이 시급한 상황임을 언급한 것이다. 이수광이 제방을 개축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이후 수령들에게 제방 관리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지적하고자 했음은 분명하다.

이 외에도 이수광은 순천 곳곳을 다니면서 현지 실정을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순천의 조세 부담액을 결정하였다. 이수광은 크게는 학교와 토지제도의 운영에서부터 소금이나 땔감과 같은 사소한 물건의 부과에 이르기까지 조세 수취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모두 일정한 규정을 정하여 운영하였다. 이러한 운영은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이 자기만으로 끝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자기의 경험을 정리하여 책으로 편찬함으로써 후임 수령과 순천 지역의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승평지』에는 임진왜란 직후 순천 지역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하는 내용뿐 아니라, 지방관으로서 이수광이 갖고 있던 백성에 대한 사랑도 배어있는 것이다. 순천은 스스로 ‘팔마’의 도시임을 자부한다. 고려시대의 청렴한 관리 최석(崔碩)의 일화에서 비롯된 ‘팔마비’의 일화를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청렴한 관료가 한 번 부임하고 나면, 후임 관료들도 쉽게 부정을 저지르기 어렵다는 경험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순천팔마비를 중건했던 이가 바로 이수광이었다. 최석의 애민 정신을 잇겠다는 포부의 발로이다. 이 점이 『승평지』가 순천 사람들에게 소중한 또 다른 이유이다.

[순천만을 위한 책 둘, 강남악부]

『승평지』는 다른 곳에도 비슷한 유형의 책들이 많다. 그러나 『강남악부』는 오직 순천에만 있는 책이다. 『강남악부』는 순천 출신 사족인 조현범(趙顯範)이 1784년에 편찬하였고, 1936년에 석판본으로 간행한 책이다. 순천의 역사와 인물을 악부로 지은 것이다.

순천에 대한 역사를 쓴 책임에도 불구하고 제목을 ‘강남’으로 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른 시기부터 순천은 ‘소강남’으로 불렸다. ‘강남’은 중국 양자강 이남 지방, 좁게는 양자강 상류의 강소성, 안휘성 남부와 절강성, 호남성 일대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지방은 산수가 수려하고 물산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살기 좋은 낙토(樂土)로 회자되어 왔고,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음풍농월(吟風弄月)이 이곳을 배경으로 특히 많이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도 자연환경이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면 ‘강남’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곤 했다.

다음으로 악부란 것은 무엇인가? 한국에서는 역사를 시로 읊은 사시집(史詩集)을 통상 악부라고 했다. 광해군 때 심광세(沈光世)가 명나라 이동양(李東陽)이 지은 『서애악부(西涯樂府)』를 모방해서 『해동악부(海東樂府)』를 엮은 것이 그 효시였다. 『강남악부』의 저자인 조현범 역시 심광세의 『해동악부』에 영향을 받아 『강남악부』를 구상했다고 한다. 전자가 국가사(國家史)를 대상으로 하였다면, 후자는 순천 지역사를 그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즉 고려에서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순천 지방의 역사적 사실들을 모아 시를 읊어 정리한 다음, 관련 인물들의 행적과 구체적인 사실(史實)들을 낱낱이 주석을 붙여 『강남악부』라고 제목을 붙인 것이다.

조현범『강남악부』를 탈고한 것은 조현범의 나이 69세 때인 1784년의 일이지만, 그것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10여 년 전이었다. 조현범은 순천 지방의 훌륭한 사적이나 일화 등이 사라지지 않고 후세에 전할 목적으로 『강남악부』를 썼다. 물론 목적이 거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옥천조씨 선조들의 행적을 밝히고 이를 통해 자기 가문의 우월함을 알릴 목적도 있었다. 『강남악부』에는 총 138명의 인물이 나오는데, 그 중 옥천조씨가 25명이나 된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이 제대로 달성되기 위해서는 자기 문중 선조에만 국한해서는 안된다. 『강남악부』를 저술할 당시 순천을 대표하는 명문거족들의 선조에 대한 업적도 아울러 정리해야 한다. 그 때문에 그러한 인물들에 대해 지면을 할애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다른 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순천의 주요 가문의 역사가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강남악부』는 이처럼 순천만의 고유한 역사를 기록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대부분 내용이 어느 때의 기사인지 확인할 수 있다. 또 그 속에서 묘사된 다양한 사회 풍속은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그런 점에서 『강남악부』는 순천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책일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사를 연구하는 데도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그런 점에서 『강남악부』는 순천의 자랑이기도 하다.

[강남악부로 역사 복원해 보기]

순천시의 자랑 『강남악부』를 활용하는 방법을 한 가지 소개해보겠다. 『강남악부』에는 수많은 일화가 담겨 있다. 그러나 내용이 소략해서 정확한 정황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몇 개의 자료로 보완한다면 매우 구체적인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강남악부』의 내용이다.

강씨는 누구의 딸인지 모른다. 정유년에 일본군이 용두에 해촌 사이에 주둔해 있으면서 권농(勸農)을 정하여 민간에게 세금을 거두었다. 한 일본군이 강녀(姜女)의 집에 와서 세금을 내라고 협박하였다. 강씨는 일본이 남의 나라에 쳐들어와 협박하면서 세금을 거두는 것에 분기가 일어나, 그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술을 주어 마시게 한 다음 식사를 준비하겠다고 부엌에 들어가 식칼을 갈아 두었다. 일본군이 술에 취해 쓰러지자 그를 찔러 죽였다.

첫 번째 의문. 권농이란 무엇일까? 『난중잡록』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② 일본군의 권농 유수복(劉守福) 등 3명이 왜교성을 쌓는 공사에 참여시킬 승려들을 모집하기 위해 말을 타고 절에 왔다가 박언량 등에게 포박되었다.

『강남악부』에서는 권농이 세금을 거두고 있다. 위의 기사는 조선 사람이 권농을 맡고 있고, 그 역할은 왜교성 수축에 동원할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제 『조선왕조실록』을 보자.

③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시언(李時言)이 보고하였다.

"해남·강진·장흥·보성·무안 등의 고을은 인민이 거의 다 적에게 붙었다. 해남의 노직 향리(老職鄕吏) 송원봉과 가속 서리(假屬書吏) 김신웅 등은 좌수(座首)라느니 별감(別監)이라느니 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제멋대로 살육하였으며, 육방(六房)을 임명했는데, 시노(寺奴) 심운기는 이방, 향리 송사황은 호방, 사노 서명학은 예방(禮房), 사노 박인기(朴麟奇)는 병방(兵房), 향리 차덕남은 형방(刑房), 사노 박희원(朴希元)은 창색(倉色), 사노 다물사리·쥐돌이[注叱石乙伊] 등은 도장(都將), 사노 윤해(尹海)는 각처의 정탐으로 각각 차정하여, 왜노가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모든 성의와 힘을 다하여 왜노에게 아양을 떨었다.

향리와 천인 등 주로 하층 계급들이 적극적으로 일본군에 협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권농이라는 직책이 나오지 않지만, 협력한 조선 사람들에게 이방과 같은 직책을 주고 있음도 알 수 있다. 그럼 이들은 왜 협력했을까? 또 『난중잡록』을 보자.

④ 적장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가 만여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임실에서 남원에 왔다가, 다음날 구례로 가서 거기에 주둔하였다. 그는 산에 들어간 사람을 유인해 내다가 민패를 주고 쌀도 주었다. 도로에다 난동을 금지하는 군대를 두어 왕래하는 왜적이 수색하고 노략하지 못하게 하니, 궁한 백성이 우선 당장에 편안함을 다행으로 여겨 투항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⑤ 적장 요시라(要時羅)는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라우도에서 곡성에 와 주둔하여 민패를 주며 백성을 달래니, 투항해 들어가는 자가 여간 많지 않았다. 그리고 민간에 가서 약탈하는 것을 엄하게 금지하니 본현과 남원 남서면의 무지한 어리석은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들어가 민패를 받았다. 남원 출신 하원서의 딸이 곡성의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다. 하원서는 민패를 차고 적진으로 들어가 그 딸을 만났다.

이제 의문이 풀렸다. 일본군은 민패를 발급하는 조건으로 약탈한 곡식을 나누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민패를 발급받으면 일본군의 약탈에서도 제외되었고, 일본군 진영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가난한 백성들이 일본군에 투항하는 경우가 많았다. 민패를 발급받는 것은 일본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때문에 민패와 함께 쌀을 받기도 하였지만, 이후에는 그에 따른 세금과 부역의 의무를 져야 했다.

『강남악부』는 단편이다. 그러나 실마리를 준다. 몇 개의 자료로 보완하면 좀 더 구체적인 사실을 알 수 있다. 『강남악부』가 다루는 특정 시기에 순천 지역의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강남악부』는 순천시 역사의 소중한 자산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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