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0660
한자 林炳瓚
영어공식명칭 Im Byeong-chan
영어음역 Im Byeong-chan
영어공식명칭 Im Byeong-chan
이칭/별칭 중옥(中玉),돈헌(遯軒)
분야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홍영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1년연표보기 - 임병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66년 8월 - 임병찬 전주부 식년감시 장원
활동 시기/일시 1889년 - 임병찬 거문도 설진별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916년 6월 23일연표보기 - 임병찬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28년 - 하청사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29년 - 동의기념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임병찬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임병찬 출생지 -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 남산마을
거주|이주지 임병찬 거주지 - 전라북도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활동지 임병찬 부임지 -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지도보기
성격 관인|의병|독립운동가
성별
본관 평택(平澤)
대표 경력 낙안군수|태인의병 의병장|독립의군부 결성

[정의]

근대 순천 지역에서 낙안군수를 지낸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

[가계]

임병찬(林炳瓚)[1851~1916]은 전라북도 옥구군 서면 상평리 남산[현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 남산마을]에서 태어났다. 임병찬의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중옥(中玉), 호는 돈헌(遯軒)이다. 임용래(林榕來)와 개성왕씨(開城王氏) 사이에서 출생했는데, 임병찬의 집안은 옥구의 대표적인 향리(鄕吏) 출신이었다.

[활동 사항]

임병찬은 4~5세 때부터 한문을 익혀 유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1866년(고종 3) 8월에 전주부의 식년감시(式年監試)에서 장원을 하였다. 하지만 가난했던 임병찬은 집안 형편을 고려하여 옥구형방(沃溝刑房)을 시작으로 향리의 길을 걸었다. 이후 약 20년 동안 옥구현 향리 및 전주부 영리로 활동하는 동안 수령과 관찰사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다. 또한, 이 과정에서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여 1876년(고종 13) 이후 기근과 흉년이 들면 거액의 진휼금을 여러 차례 기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전라도 유생들의 천거를 받아 1889년(고종 26)에 거문도(巨文島) 설진별감(設鎭別監)에 임명되었다가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첨절제사(樂安郡守兼順天鎭管兵馬僉節制使)에 제수되었다. 이후 낙안군수로 부임한 임병찬은 지방행정의 각종 폐단을 바로잡았다. 그뿐만 아니라 1884년(고종 21) 이후의 낙안군의 막대한 포흠(逋欠)[관청의 물건을 사사로이 소비하는 것]을 해결함으로써 주민들의 신망과 지지를 크게 얻었다. 1년여 만에 낙안군수에서 물러나게 되자, 임병찬은 주민들을 괴롭히는 명분이 되는 만인산(萬人傘)[선정을 베푼 고을 수령에게 백성들이 그의 이름을 적어 송덕(頌德)의 기념으로 주었던 물건] 제작 및 거사비(去思碑)[선정을 베푼 감사(監司)나 수령(守令) 등이 갈린 뒤에 그들의 공덕을 기리어 그 고을 주민들이 세운 비석] 건립을 금지했다. 이러한 선정으로 말미암아 낙안 군민들은 임병찬의 유임 운동을 벌이며 이임을 아쉬워하였다.

임병찬은 관직에서 물러나 이미 1882년에 이거 한 전라도 태인군(泰仁郡) 산내면(山內面) 영동(榮洞)[현 전라북도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에 칩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약계(洞約契)를 실시하는 한편, 수세에 몰린 김개남(金開南)[1853~1895]의 체포에 협조했다. 이후 전주 등 7읍의 균전위원(均田委員), 태인약장(泰仁約長)으로 활동하던 중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굳혔다. 이때 최익현(崔益鉉)[1833~1906]의 제자인 최제학(崔濟學)[1882~1959]을 만나 거의(擧義) 방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최익현의 제자가 되어 의병의 실무를 전담하였다. 1906년 6월 최익현의 주도로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켜 정읍, 곡성, 순창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가 약 열흘 만에 해산하였다. 임병찬을 비롯하여 최익현 등 태인의병을 주도한 13명이 체포되어 서울의 일본군 사령부로 압송되었다. 임병찬은 최익현과 함께 일본 쓰시마[對馬島]의 위수영에 감금되어 있다가 1907년 1월 1일 최익현의 사망으로 인해 1907년 3월에 석방되어 향리에 돌아와 암중모색하며 세월을 보냈다.

임병찬은 1910년 8월 병탄 소식에 격분하여 은사금을 거부하였다. 1912년에 공주 유생 이식(李侙)[1873~1936]으로부터 고종의 칙령(勅令)을 전해 받은 임병찬은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의 결성에 앞장섰다. 이후 임병찬은 독립의군부 조직을 전국에 확산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독립의군부의 일부 조직이 일제에 의해 발각됨으로써 임병찬은 경시청에 구금되어 고종과의 연관성을 집중적으로 추궁당했다. 결국, 임병찬은 1년 정배형에 처해져서 거문도에 감금되어 있다가 다시 1년형이 연장되었으나 1916년 6월 23일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거문리 거문도 덕촌마을에서 운명하였다.

[저술 및 작품]

임병찬의 유고집으로 『돈헌유고(遯軒遺稿)』가 전한다.

[묘소]

임병찬의 시신은 태인의 본가로 운구되어 회문산 자락에 안장되었다. 임병찬의 유족과 문인들이 1928년에 하청사(河淸祠)를 건립했으며, 태인의병과 독립의군부의 활동을 새긴 동의기념비(同義紀念碑)는 1929년에 건립되었다.

[상훈과 추모]

임병찬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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