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6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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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應三 |
영어공식명칭 | O Eung-sam |
영어음역 | O Eung-sam |
영어공식명칭 | O Eung-sam |
분야 |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홍영기 |
[정의]
일제강점기 순천 출신으로 강진원 의병부대에서 활동한 의병.
[활동 사항]
오응삼(吳應三)[1864~1909]은 순천군 초천면(草川面) 호산(虎山)[현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호동리]에서 살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인해 외교권을 상실한 대한제국은 국가의 상징인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했으며, 얼마 되지 않은 군대마저 해산당하는 비운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에 일반 국민들도 일본의 제국주의 침탈에 대해 격분하였다.
오응삼은 1908년 후반 흔히 강승지(姜承旨) 의진으로 알려진 강진원(姜振遠)[일명 강형오(姜炯吾), 1881~1921]의 의병부대에 투신하여 의병활동을 벌였다. 강진원 의병부대는 순천의 조계산을 주된 근거지로 삼아 활동했는데, 인근 지역인 고흥(高興)[옛 흥양(興陽)], 광양 등지에서도 활발하게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08년 10월 29일 오응삼은 이기춘(李己春)[1879~1909] 등 약 170명의 의병과 함께 순천경찰서에서 당시 흥양주재소로 부임하던 일본인 순사 택전심길(澤畑甚吉)을 요격(邀擊)[공격해 오는 대상을 기다리고 있다가 도중(途中)에서 맞받아침], 처단하였다. 1908년 12월 이후에 오응삼은 동료 의병 8명과 함께 고흥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벌였다. 1909년 3월 오응삼은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이기춘과 같이 흥양주재소 순사들에게 체포되었다. 일본인 순사는 이들을 광주지방재판소로 호송하기 위해 순천군 소안면(蘇安面) 장내리(墻內里)[현 순천시 옥천동] 산길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일본인 순사는 이들이 탈출을 기도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칼로 무참히 살해하였다.
[상훈과 추모]
오응삼은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