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6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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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許希仁 |
영어공식명칭 | Heo Hee-in |
영어음역 | Heo Hee-in |
영어공식명칭 | Heo Hee-in |
이칭/별칭 | 인백(仁伯),반구정(伴鷗亭)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욱 |
출생 시기/일시 | 1516년 - 허희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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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49년 - 허희인 무과 을과 3등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49년 - 허희인 훈련원주부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59년 - 허희인 서부주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59년 - 허희인 사헌부감찰 승진 |
활동 시기/일시 | 1559년 - 허희인 무안현감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572년 - 허희인 사망 |
출생지 | 허희인 출생지 - 전라남도 순천시 |
부임|활동지 | 허희인 부임지 - 전라남도 무안군 |
묘소|단소 | 허희인 묘소 -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
성격 | 무관 |
성별 | 남 |
본관 | 양천 |
대표 관직 | 훈련원주부|사헌부감찰|무안현감 |
[정의]
조선 전기 순천 출신의 무관.
[가계]
허희인(許希仁)[1516~1572]의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인백(仁伯), 호는 반구정(伴鷗亭)이다. 아버지는 양천허씨 순천 입향조인 허형(許亨)[1489~1564]이고, 어머니는 박증손(朴曾孫)[1496~1573]의 딸이다. 부인은 합천이씨(陜川李氏)로 이수신(李守慎)의 딸이요, 아들은 승평사은(昇平四隱)의 한 사람인 허엄(許淹)[1538~1610]이다.
[활동 사항]
허희인은 1549년(명종 4) 24세의 젊은 나이에 무과에 을과(乙科) 3등으로 급제하여, 1549년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가 되었다. 1555년 왜구의 배 70여 척이 달량포와 이진포를 침입하여 성내를 방화하고 약탈하였다. 당시 전주부윤이었던 이윤경(李潤慶)[1498~1562]과 정걸(丁傑)[1514~1597]의 활약으로 왜구를 물리쳤다. 이후 왜구들은 녹도와 제주로 퇴각하였다. 이때 허희인은 전라우수사 최호(崔豪)의 좌부장(左部將)으로서 녹도로 퇴각한 왜구들을 추격하여 나로도에서 물리쳤다. 1559년(명종 14)에는 서부주부(西部主簿)에 임명되었고, 바로 사헌부감찰로 승진하였다. 1559년 가을 무안현감(務安縣監)에 임명되었다. 무안현감으로 재직할 때 청렴하고 선정을 베풀어 명성을 날렸다.
[학문과 저술]
허희인은 1559년 무안현감으로 부임하고 1560년 병 때문에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옥계리 동쪽 옥천(玉川) 가에 반구정(伴鷗亭)을 짓고 유유자적한 삶을 보냈다. 허희인은 「반구정기」와 함께 시를 남겨 강호에 은둔하는 삶의 즐거움을 노래하였다.
[묘소]
허희인의 묘는 순천부 해룡면(海龍面)[현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기봉(基峰) 아래 지등(池嶝)의 언덕에 있다.
[상훈과 추모]
허희인의 삶은 효성이 높고 청렴하며 덕정(德政)을 베푼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구암(龜巖) 이정(李楨)[1512~1571]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조현범(趙顯範)[1716~1790] 역시 『강남악부(江南樂府)』에서 허희인의 효행과 청렴함을 칭송하는 악부를 지어 남겼다. 허희인의 덕정에 대해 무안 사람들도 송덕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