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5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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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慶業 |
영어공식명칭 | Im Gyeong-eop |
영어음역 | Im Gyeong-eop |
영어공식명칭 | Im Gyeong-eop |
이칭/별칭 | 영백(英伯),고송(孤松),충민(忠愍)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욱 |
출생 시기/일시 | 1594년 - 임경업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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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18년 - 임경업 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25년 - 임경업 방답첨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26년 - 임경업 낙안군수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28년 - 임경업 체찰부 별장 부임 |
추모 시기/일시 | 1628년 4월 - 임경업 낙안 군민들이 선정비와 비각 세워 기림 |
몰년 시기/일시 | 1646년 - 임경업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97년 - 임경업 낙안향교 옆에 충민사를 지어 제향 |
부임|활동지 | 임경업 부임지 -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
사당|배향지 | 충민사 -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교촌리 |
사당|배향지 |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 - 충청북도 충주시 충열1길 6[단월동 385-1] |
성격 | 문관 |
성별 | 남 |
본관 | 평택 |
대표 관직 | 낙안군수 |
[정의]
조선 후기 순천 지역에서 낙안군수를 역임한 문관.
[가계]
임경업(林慶業)[1594~1646]의 본관은 여흥(驪興), 평택(平澤)이고,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이다. 판서 임정(林整)[1356~1413]의 7대손이고, 아버지는 임황(林葟)이다. 출생지는 충주 달천이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평안도 개천이라는 설도 있다.
[활동 사항]
임경업은 1618년(광해군 10) 아우인 임사업(林嗣業)과 함께 무과에 급제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정충신(鄭忠信)[1576~1636]의 휘하에서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이 되었다. 그 공으로 1625년 방답첨사가 되었고, 1626년에는 낙안군수로 부임하였다. 낙안군수로 재임할 때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전라병사 신경인(申景禋)[1590~1643]의 좌영장으로 출전하였으나, 한양[현 서울특별시]에 도착하기도 전에 강화가 성립되어 도로 내려왔다. 낙안으로 돌아온 임경업이 “나에게 정병 4만만 있으면 오랑캐를 무찌르고 압록강에서 칼을 씻고 오겠다.”라는 비장한 말을 했다는 전설이 낙안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1628년 체찰부(體察府)의 별장이 되어 낙안을 떠났다.
[관련 일화 및 전설]
임경업은 낙안군수로 2년간 재임하였다. 그런데 임경업이 같은 낙안 출신인 김자점(金自點)[1588~1651]에 의해 억울한 죽임을 당했기 때문인지, 임경업과 관련된 전설이 낙안에는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낙안읍성 축조와 관련된 설화이다. 낙안에는 임경업이 낙안읍성을 쌓았다고 전해오고 있다. 하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낙안읍성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임경업이 한 일은 무너진 읍성의 일부를 수리했다고 보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임경업이 하루 만에 낙안읍성을 쌓았다고 한다. 또 낙안읍성을 쌓으면서 누이와 내기를 했다는 설도 있다. 즉 읍성을 쌓는 동안 누이가 낙안군 군사 2천 명의 옷을 짓기로 하여, 누가 빨리 끝내느냐는 것이었다. 누이는 진작 옷을 다 만들었지만, 동생에게 실망을 주기 싫어 마지막 군복의 옷고름을 뜯어내고 동생이 성을 다 쌓고 돌아오기를 기다림으로써 승리를 양보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와 비슷한 또 다른 이야기로 덜컹다리 혹은 봉룡다리[鳳龍橋] 축조가 있다. 낙안 소재지에서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상사면으로 가는 길목에 용소에서 흘러내린 물이 만든 내가 있었다. 내가 깊어 버선을 벗고 건너야만 했다. 특히 추운 겨울에는 매우 불편했다. 낙안군수로 부임한 임경업이 어느 날 밤 하인을 데리고 그곳에 갔다. 그리고 내 근처에 넓적하고 긴 돌 하나를 도포 자락으로 불끈 들어 내에다 덜컹하고 걸쳐 놓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리가 하나 생긴 것이다. 이후 이 길을 왕래하는 사람들이 편리하게 내를 건너다닐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하룻밤에 큰 돌을 덜커덩 내려놓아 만들어졌다고 하여 이 다리를 ‘덜커덩다리’, ‘덜컹다리’라고 부른다.
[상훈과 추모]
임경업은 낙안군수로서 2년간 짧게 재임하는 동안 선정을 베풀었다. 이에 이임한 직후인 1628년(인조 4) 4월 낙안 군민들은 선정비와 비각을 세워 임경업을 기렸다. 그리고 이후 지방 수호신으로 신봉되고 있다. 매년 정월 보름에 면민대제(面民大祭)를 지낸다. 이외에도 임경업이 복관된 1697년(숙종 23) 이후 낙안향교 옆에 충민사(忠愍祠)를 지어 제향하고 있다. 임경업의 시호는 충민(忠愍)이고, 낙안 이외에도 충주의 충렬사(忠烈祠)[사적 제189호], 선천의 충민사(忠愍祠), 백마산성의 현충사(顯忠祠), 겸천(兼川)의 충렬사 등에 제향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