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 의병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303
한자 壬亂義兵
영어공식명칭 Anti-Japan Volunteer Soldiers of Imjin War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우인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임란 의병 발생
발단 시기/일시 1592년 - 임진왜란 발발
발생|시작 장소 임란 의병 - 경상북도 성주군
종결 장소 임란 의병 - 경상북도 성주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배덕문|김면|정인홍|곽재우|김천설|김천택|도응운|박명윤|배상룡|이언부|이언영|김연|김천호|박혼|송광종|이규문|이양득|도종호|박이장|박이현|이승|정언충|배설|배건|배상룡|우배선

[정의]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성주 지역민이 조직한 민병.

[개설]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적이 빠르게 북상하자 성주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장 배덕문(裵德文)을 위시한 약 49명의 의병으로서, 성주성과 인근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끈질긴 투쟁을 벌였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 초기 대군으로 편성된 왜군이 빠르게 북상하자 성주 인근 고을의 수령들은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피신하기에 급급하였다. 성주판관 고현도 젊은 무부(高晛)였지만 홀로 먼저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왜군은 5월 10일 현풍, 5월 18일 성주, 6월 12일 개령(開寧)[현 경상북도 김천 지역]을 점거하고 낙동강 수로를 장악하여 후방 보급을 원활하게 하는 한편, 북상한 군대의 후방 안전 확보에 주력하였다. 성주 지역에서는 수십 명 내지 수백 명의 왜군이 이 일대를 점거하여 거점을 지키면서 주변을 약탈하고 있었다.

[경과]

임란 의병은 임진왜란 발발 초기 피신에 급급했던 사람들이 왜적에 대항하는 의병을 결성하면서 시작되었다. 경상도의 의병 부대는 대체로 자신들의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성주 지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성주 인근의 낙동강은 왜군의 중요한 보급로였을 뿐만 아니라 약탈품의 수송 길이기도 했기 때문에 지역 의병들의 활동도 낙동강 연변에 집중되어 있었다. 김면(金沔)과 정인홍(鄭仁弘), 곽재우(郭再祐) 등이 각기 낙동강의 한 구역을 맡아 일본군에 대항하고 있었다.

성주의 의병으로 활동한 인물들은 의병장 배덕문을 비롯하여 약 49명이 확인된다. 주로 성주 의병장 배덕문이나 이웃 고을 의병장인 김면, 정인홍, 곽재우의 의병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곽재우 부대에서 활약한 인물은 김천설(金天渫), 김천택(金天澤), 도응운(都應雲), 박명윤(朴明胤), 배상룡(裵尙龍), 이언부, 이언영(李彦英), 김연, 김천호, 박혼, 송광종, 이규문, 이양득 등이었다. 김면 휘하에서 활동한 인물은 도종호, 박이장(朴而章), 박이현(朴而絢), 이승(李承) 등이었고, 정인홍 휘하에서 활동한 인물은 정언충 등이었다. 직접 전투에 참가하는 일, 군량을 마련하여 지원하는 일, 격문을 작성하여 의병을 모집하는 일, 명군의 군량을 운반하는 일 등을 담당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던 배덕문은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68세의 노구를 이끌고 성주성 탈환 전투에 참여하였다. 적장의 목을 베고 장검 두 자루와 금부채 한 개를 노획하는 전공을 세우고, 왜군에 부역하면서 횡포가 극심했던 승려 찬희를 척살하였다. 배덕문의 집안에서는 아들 배설(裵楔)배건(裵楗), 손자 배상룡 등 많은 의병들을 배출했고, 배건은 인근 김산 전투에 참여했다가 전사하였다.

제말(諸沫)은 왜군을 토벌한 공으로 주부(主簿)에서 목사(牧使)로 승진했고, 계책을 세워 지휘하고 몸을 돌보지 않고 적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성주의 속현인 화원현(花園縣)에서는 우배선(禹拜善)이 24세의 나이로 창의하였다. 우배선은 관군에서 이탈한 군사들을 규합하여 100명 내외의 소규모 의병진을 결성한 후 비슬산(琵瑟山)과 최정산(最頂山)을 무대로 크고 작은 전공을 많이 올렸다.

[결과]

3차에 걸친 탈환전으로 임진왜란 초기 왜군에 점령되었던 성주성을 수복하였다. 매번 바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견디다 못한 왜군이 철수함으로써 수복할 수 있었다. 성주 및 인근 지역 의병과 관군이 연합하여 펼친 끈질긴 투쟁의 소중한 결과였다. 선조는 “내가 경상도의 충의를 믿었거니와,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구나!”라고 칙유(勅諭) 하였다. 성주성의 수복으로 이 일대가 왜군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을 선산 방면으로 쫓아냄으로써 전라도를 침범하려는 일본군의 계획을 좌절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의의와 평가]

우배선 부대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는 생생한 문서가 전해지고 있어 당시 의병의 모습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의병진 군공책 1점, 교첩(敎牒) 2점과 교지(敎旨) 10점, 간찰(簡札) 1점, 각택기(各宅記) 1점 등이 전해진다. 우배선은 군공책에서 전과를 거둔 의병들의 개인별 인적 사항과 함께 칼과 같은 베는 무기에 의한 참살, 활에 의한 사살, 타격 무기에 의한 작살을 꼼꼼하게 구별해서 기록해 놓았다. 당시 의병의 구체적 구성 성분과 전투 기술적인 양상 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아 2002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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