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T0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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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김종한 할아버지의 家族과 親戚 이야기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 |
집필자 | 이민우 |
출생과 청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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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한 할아버지
김종한 할아버지는 1924년 갑자년 9월생으로 만 82세이다. 어머니는 그를 낳을 때 특별한 태몽을 꾸지는 않았다고 하신다. 아버지는 김해 김씨인데, 성명은 김영곤이고, 어머니는 밀양 박씨로 성명은 김순자다. 그의 아내는 경주 김씨로 금지 출신이다.
"나는,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인 남원 용성보통학교를 다녔는데, 그 땐 왜정 때라 한국 사람은 다섯 양반인가 밖에 없고 전부 왜놈들이었어요. 용성보통학교를 28회로 졸업한 뒤, 남원농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4회로 졸업했구요.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은 주로 일본놈들이라 대부분 기억할 필요도 없지만, 그 중에서도 국민학교 시절 백천(百千) 선생은 생각나요. 이 분은 우리 5-6학년 때 담임을 맡은 일본인이었는데, 우리 한국인 학생들을 일본인과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마음속으로 차별 대우를 하지 않으셨지요. 그 당시 보통 일본놈들은 대일본제국과 천왕에 대해서 무조건 만세를 하라고 그랬는데, 이 분은 우리들에게 좌우당간 공부도 열심히 하라고 하시고, 사회 공헌과 부모님에 대한 효도 등을 중점으로 가르쳤고 공부도 잘 가르쳐 주셨지요. 그 때는 전주사범학교가 참 입학하기가 어려웠는데, 전주사범학교도 많이 들어가고, 전고도 많이 들어가고, 전주농업학교, 남원농업학교 등 한 70% 정도가 상급학교로 입학했어요. 그래서 졸업하고 한 15년 후에 용성보통학교 28회에서 30회 출신들 중 약 20여 명이, 백천(百千) 선생을 사흘인가 나흘인가 동안 한국으로 초청하여 대접하고 옛날 다니던 학교를 방문하기도 했지요."
김종한 할아버지는 7세에 보통학교를 입학하여 17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당시에는 졸업을 하면 학교에서 취직을 시켜 주었다. 그 당시 농회라는 것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하는 일은 농사를 장려한다고 하였지만 속으로는 우리 농촌 사람을 수탈하고 공출을 심하게 하는 조직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 김종한 할아버지 집이 60-70마지기의 대농이어서, 농회에 가려 했으나 나이가 어려서 안 되었다. 겨우 17살 먹은 사람이 면에 가서 지도를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김종한 할아버지는 선생님과 상의를 했고, 선생님께선 금융조합에 가라고 조언을 하셨다. 지금의 농협격인데 왜정 때는 금융조합이라고 하였다. 서류를 내고 전주에서 시험을 보라는 연락이 와서 시험을 보아 합격하여(남원에서 3-4명이 합격함) 전주 서대문에 있는 금융조합[현 농협중앙회]에서 약 한 달간 교육받은 뒤, 정읍 금융조합(구 태인면 소재)으로 처음 발령을 받았다. 김종한 할아버지는 여기에서 약 2년간 근무하였다. 첫 봉급액은 약 28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여기에서 근무하는 동안에 신검을 받았는데 제2 을종 야포병으로 결정되어, 1945년 8월 30일 용산에 입대할 예정이었어요. 군입대를 피하기 위해 1년 전에 생전 보지도 못한 사람과 아버지의 권유로 결혼을 하게 되었지요. 결혼 후 곧바로, 나는 혼자서 다시 정읍으로 가서 근무하다가 5월 중에 퇴사하여 남원 현재의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러던 중 그 해 8월 15일에 해방을 맞이해서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었지요."
그는 1925년 을축년 생인 아내(김영애)와 해방둥이인 장남을 포함하여 3남 3녀를 두고 있다. 자식들은 모두 서울에 거주하고 있고 그와 아내만이 여기에 살고 있다. 현재 김종한 할아버지 부부는 원래 부모님께서 대농(60-70마지기)이라 많이 받은 상속분으로 생활하고 있다.
친척은 타지로 많이 떠나고 지금은 구암마을에 35가구 정도만 실제로 거주하고 있다. 친척들간의 교류 시기는 벌초할 때, 시제 지낼 때(음력 10월) 혹은 봄 3-4월경에만 약 20여 명씩 참석한다. 옛날에는 50여 명씩 참여했었다. 객지에 있는 사람들은 잘 참석하지 않는다. 앞으로는 묘사(시제)도 어렵지 않겠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혼인
결혼은 그가 스무 살이고 아내는 열아홉 살일 때, 부모님의 권유로 결혼하게 되었다. 안사람 얼굴도 보지 못한 상태였다. 옛날에는 부모님이 장가가라면 가야지 별 방법이 없었다. 어디에다 대고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금지면까지 기차타고 가서 거기서 말 타고 처가 동네까지 갔다. 금지면 신월리에 있는 아내 집으로 가서 그 동네 어르신의 주례로 혼례를 치렀다. 스무 살에 장가갔으니까 지금으로부터 62년 전이다. 신혼여행은 아예 없었다. 결혼 3일 후 처가에서 남원 집으로 왔다가 다시 이틀 후 금융조합에 근무하러 정읍군 태인으로 다시 갔다. 아내는 남원 집에 두고 홀로 갔었다.
통과의례
김종한 할아버지는 자기 집에서 태어났다. 옛날에는 병원에서 출산한 게 아니라 대부분 집에서 출산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들이 태어나니까 좋아서 난리가 났다. 백일 잔치는 가족, 친지들을 초대하여 집에서 했다. 돌 잔치 때는 돼지, 닭 한 마리도 잡지 않았다. 돼지 잡고 할 때는 회갑이나 결혼식 때였다. 사위나 와야 암탉 한 마리 잡았다. 옛날에는 아주 어려운 손님이 왔을 때 계란 세 개를 쪄서 내놓았다. 옛날에 계란은 고급 음식이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보통 사람들은 명베로 만든 옷을 스스로 만들어 입혔고,부자들이나 색동옷을 입혔다. 그 때는 시중에서 별로 살 것도 없었다. 회갑 때 보통사람들은 속옷, 겉옷, 두루마기 등 모두를 새 명베로 만들어 새로 바꿔 입었고, 부자들은 누에고치에서 뽑은 명주로 만든 옷을 입었다. 그러나 한 마을에 회갑까지 생존한 사람은 1-2명에 불과하였고, 고희까지 생존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혼례시에는 남자는 관복을, 여자는 족두리 등을 착용하였는데 부락 이장이 공동 관리 하였다. 동네 기금으로 이것들을 장만해 놓고 경사가 있을 때에는 그 집에서 가져다 사용하고 난 후 다시 이장에게 가져다 주었다.
사람이 죽으면 모두가 일가이니까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부엌일을 하고 남자들은 남자들대로 자기들 일을 맡아 자급자족하는 것처럼 모두가 알아서 일을 하였다. 사람이 죽었을 때에 입히는 옷은 수의를 입혔다. 수의는 겨울이든, 여름이든지 주로 삼베로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다른 것은 잘 썩지 않지만 삼베는 3년만 지나면 모두 썩기 때문이다. 장례식 때에는 남자의 경우에는 상주와 8촌까지는 곤을 쓰고 명베나 삼베로 만든 상복을 입었고 8촌 이상의 사람들은 그냥 참석만 하였다. 이 때 입는 옷은 여름에는 삼베를 겨울에는 명베로 만든 옷을 주로 입었다. 부잣집에서는 이러한 옷을 새로 만들어 입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빌려서 입었다. 여자는 하얀 옷에 머리에 띠를 둘렀다. 수의는 아무 때나 만들어 놓은 게 아니라 55세가 넘으면 공달 든 해에 미리 만들어 두었다. 수의를 미리 만들어 놓은 이유는 수의를 미리 만들어 놓아야 안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복은 마을에서 이장이 공동 관리 하였다.
여자들이 임신/출산시에 피하는 음식으로는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개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치료나 보양을 위한 음식으로는 신선한 야채 같은 것이 있었다. 뱃속의 애기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그런 것 같다. 언행도 조심해야 하고 음식도 조심해야 하고 남하고 다투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등 여러 얘기가 있었다. 이런 것들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다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러나 그 때 당시 여자들은 밤낮으로 일이 많아서 잠도 제대로 못자고 정서적으로 쉴 데가 없었다. 또한 선풍기도, 냉장고도, 전기불도, TV도, 라디오도 없는 등 우리 어머니나 할머니들은 아주 불쌍하였다. 자고 일어나면 일 뿐이었다.
"성년이 된 후로는 주위 어른들로부터 미성년 때보다 근신하고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고 들었어요. 그러나 우리 동네 사람들은 전부 형님, 동생, 아저씨이고 더군다나 우리 집은 종가집이어서 촌수가 굉장히 낮아 특별히 어른들로부터 대우가 달라지지는 않았지요. "
"환갑 때는 인간문화재인 강덕우라는 친구가 내가 환갑이란 걸 미리 알고 기생 한 명을 데리고 와서 하루종일 놀았어요. 회갑시에는 손님들을 접대해야 하니까 삼실과(대추, 밤, 감), 이과, 떡, 술, 닭, 돼지고기, 해물 등을 성의껏 마련했구요."
고희연은 자녀들이 서울 호텔에서 베풀어주었다. 그 당시 촌사람이 환갑, 고희연 두 가지 행사를 다 하는 것은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