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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우마차조합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2192
한자 群山牛馬車組合
이칭/별칭 군산하차조합,군산우차조합,군산우마차조합,군산하마차조합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집필자 정원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2년 12월 31일연표보기 - 군산 우차 조합 설립
개칭 시기/일시 1928년 3월 19일연표보기 - 하차 조합과 우차 조합이 군산우마차조합으로 통합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7년 1월 14일 - 군산 하마차 조합원 동맹 파업 실시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8년 3월 14일 - 군산 노동 연맹 제5차 정기대회 우차조합과 하차조합 합병 논의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9년 12월 29일 - 군산우마차조합 화물 운반 문제로 군산 철도노동회 회원과 무력 충돌 발생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0년 7월 16일 - 군산우마차조합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지도부 검거
성격 노동운동단체
설립자 김병순|채성학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소·말을 이용한 화물 운반 노동자 중심의 노동 단체.

[개설]

개항 이후 군산은 호남 평야와 충남 지역의 비옥한 농지를 끼고 농산물 집산지로 최적의 위치를 점하며 쌀의 집산과 대일본 수출을 위한 장소가 되었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으로 군산은 부(富)를 축적하고자 하는 일본인 자본가들이 관심을 갖는 지역으로 변하였다. 쌀의 이출입을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 항구를 중심으로 육상·해상 교통이 구축되었고 항구를 통해 드나드는 화물에 대한 운송 및 하역을 위한 노동수요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항구와 포구를 중심으로 소와 말을 이용하여 화물을 운반하는 노동자가 출현하게 되었다. 화물운반은 운송 수단에 따라 하차·우차·마차로 구분 되었다. 각 운송수단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집결하면서 친목 도모와 이익 확보를 위한 노동조합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이 중 군산에서 설립일이 정확하게 확인되는 단체는 우차 조합으로 1922년 12월에 설립되었다.

이들 노동조합은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단체로 개별적으로 존재하여 왔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 군산 노동 연맹이 중심이 되어 노동 운동의 효율성을 위해 군산 지역 노동운동 단체를 대상으로 유사 성격 단체의 통합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28년 3월 19일 하차 조합과 우차 조합이 통합되어 우마차조합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소와 말을 이용한 화물 운반자들의 활동은 군산 우마차 조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조합의 구성원은 이 시기 다른 노동단체와 같이 지도부는 사회주의 지식인이 중심이 되었고, 일반 회원은 현장 노동자가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일본인 자본가들의 원칙 없는 임금규정에 대해 파업 활동을 전개하였고, 회원들의 생활 안정을 위한 화물 운반권 확보 노력과 사회주의에 입각한 노동 운동의 전개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지만 일제는 군산우마차조합 활동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통해 제약을 가하였다. 그 결과 1930년 군산 우마차 조합 지도부 인사가 치안유지법의 적용을 받아 구속되었고, 이러한 탄압으로 정상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설립 목적]

우차·마차를 이용해 화물 운반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단결과 고용주로부터의 부당한 대우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군산부 영정 전일 여관에서 1922년 12월 31일 우차 조합이 설립되면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설립 당시 임원은 조합장 김병순(金炳淳), 부조합장 겸 회계 채성학(蔡成鶴), 간사 김영배(金永培), 정봉옥(丁奉玉)이었다.

군산 지역 노동 운동 단체의 단결성 확보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회의인 군산 노동 연맹(群山勞働聯盟)의 제5회 정기 대회에 김응배(金應培), 최돈철(崔燉澈), 김채옥(金采玉), 최경수(崔景洙), 김창술(金昌述) 등의 지도부가 참석하였다. 이들은 군산 지역 노동 운동 단체의 문제점을 공감하고 유사 단체 합병에 찬성하여 우차 조합과 하차 조합을 우마차 조합으로 합병의 노력을 보였다.

합병 이후 군산 지역 노동 운동 단체들과 협력을 통해 자본가의 부당한 대우에 연대 파업의 활동을 전개하였고, 노동자들의 근로 상황과 관련해서는 서로 대립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1930년 이후에는 일제의 감시와 억압이 심해져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었다. 특히 일제는 군산 지역 노동자들 사이에 사회주의 이념이 확산되는 상황을 경계하였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군산우마차조합을 비롯한 사회주의 노동 운동 단체의 지도자들에게 치안 유지법을 적용하여 활동에 제약을 가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군산우마차조합의 대표적인 활동은 노동자들의 임금과 관련된 파업 투쟁이었다. 일본인 자본가들이 중심이 된 군산 운송점 조합(群山運送店組合)에서 일방적으로 임금을 인하하자 이에 반대하여 파업을 전개하였다. 파업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비슷한 직종에 있는 단체인 군산 철도 노동회(群山鐵道勞働會)와 연계를 통한 연대 파업도 전개하였다.

다음으로 노동 운동의 확산을 위한 군산 지역 노동 운동 단체와의 활동 공유와 사회주의 운동 확산에 관심을 기울였다. 1927년 10월 16일 군산 양화 직공 조합(群山洋靴職工組合) 창립 1주년에 참석하여 협력을 통한 노동 운동의 필요성을 공감하였다. 1924년 1월 30일에는 조선 노농 준비 대회(朝鮮勞農準備大會)에 대표자를 파견하여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노동 운동 확산에 노력을 다하고자 하였다.

[현황]

군산우마차조합 조직과 운영 방식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어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없다. 하지만 당시 신문 기사에 언급된 내용을 통해 대략적인 모습은 확인할 수 있다. 군산우마차조합은 조합장이 중심이 되는 체제로 조합이 운영되었다. 중심 인물들은 대부분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군산우마차조합 이외에 군산 지역 다른 노동운동 단체에서 활동을 전개하며 각 단체들의 연대를 도모하였다.

[의의와 평가]

군산우마차조합은 군산 지역의 다른 노동 운동 단체와 비슷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인 자본가들의 민족 차별에 대한 저항과 사회주의 단체 간의 연대와 투쟁의 모습이 그것이다. 군산우마차조합의 이런 활동은 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에 사회주의 사상이 보급되었다는 점과 그 역할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 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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