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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1601
한자 聖堂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구민정

[정의]

천주교 전주 교구 소속으로 전라북도 군산시에 있는 가톨릭 교도들이 집회 및 예배를 위해 구성한 조직과 그 활동을 위한 경당 및 부속 건물.

[개설]

1876년 개항 이전의 군산항은 조세로 걷힌 곡물을 실은 세곡선이 거쳐 가는 작은 항구가 형성되어 있는 어촌이었다. 충청도와 전주 인근 지역에서 박해로 흩어진 천주교 신자들은 옥구, 임피 지역에 소규모로 거주하고 있었을 것이고, 항구로 사람들이 드나드는 지금의 군산 시가지에서는 거주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개항 후, 배편으로 전라도에서 서울을 오가던 선교사들이 군산항을 이용하게 되면서 선교사들의 기착지 역할을 할 본당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1900년 9월 나바위 성당의 베르모렐 신부와 전주 성당[현재 전동 성당]의 보두네 신부는 주교에게 본당 설립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당시 군산에서 확인된 신자 수는 1가구뿐이었으므로 설립은 불가능했다.

몇 년이 지난 1915-6년경 김마리아 여사의 주선으로 시내 영동에서 공소를 시작하고, 나바위 성당 베르모렐 신부를 청해 판공 성사를 보았다. 김여사는 공소를 열기 전부터 교우들을 수소문하고 있던 중에 어느 날, 우연히 옹기 장수 부인이 목에 성의를 매고 있는 것을 보고 그 부인이 사는 만동리 토점을 찾아가 여러 교우들을 만났다. 그리하여 그들과 합심해서 영동에 공소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후 김마리아 여사는 그들의 가족을 개종시키고, 전교에 전념하였다. 이 후 늘어난 신자들이 본당 설립을 위해 노력하게 되고, 1928년 신자들이 성금을 모아 열네 칸 기와집을 매입하여 공소 강당으로 사용하였다.

신자들의 노력이 가시화되자, 1929년 5월 대구 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군산 본당 설립을 위해 김영구 신부를 나바위 성당 보좌 신부로 임명하였다. 김 신부는 나바위 성당에 머무르며 군산 본당 설립을 준비하였다. 1929년 당시 군산 공소 신자 수는 일본인을 포함하여 250여명이었다.

신자들은 1930년 둔율동 군산 보통학교[현재 군산 중앙 초등학교] 옆에 있는 대성원을 매입하여 성당으로 개수하여, 1931년 본당으로 승인 받았다. 김영구 신부는 초대 주임 신부로 부임하였다.

해방 이후, 전쟁의 와중에서도 신자들의 신앙 생활의 열정은 이어져 대야 성당이 설립되었다. 수녀들은 고아들과 윤락 여성들을 돌보는 사회 복지 사업을 시행하였다. 또한 공단 지역이 확대 되면서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한 운동도 활발히 전개 되었다.

천주교 교세는 점차 확대되어, 2013년 현재 본당이 14곳이 되었다. 최근에, 새만금 간척지 개발 사업과 도시화의 진행으로 세기 전환기에 인구가 일시적으로 증가하고, 아파트 단지들이 증가하여 신자들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농촌 인구의 감소와 지속적인 유입 인구의 감소 추세 속에서 신자 수의 변동은 정체 상태에 있다. 인구 구성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환경에 적합한 선교 활동과 사목 활동의 모색이 필요해지는 가운데, 가톨릭 교회의 보편성과 한국 교회의 특수성 속에서 군산 지구의 교회 공동체의 활발한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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