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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석·문계인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1119
한자 文希奭文啓仁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두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32년연표보기 - 문희석 출생
출생 시기/일시 1771년연표보기 - 문계인 출생
몰년 시기/일시 1795년연표보기 - 문희석 사망
몰년 시기/일시 1862년연표보기 - 문계인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70년 - 문희석·문계인 정려 건립
묘소|단소 문희석과 문계인의 묘소 - 전라북도 군산시 회현면 고사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문희석과 문계인의 정려 - 전라북도 군산시 회현면 고사리
성격 효자
성별
본관 남평

[정의]

조선 후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옛 옥구현] 출신의 효자.

[개설]

문희석(文希奭)문계인(文啓仁)은 군산 지역[옛 옥구현]에 세거한 남평 문씨 시중공파 출신으로 부모에게 지극한 효성을 다하였고, 그 효행으로 유림들의 천거를 받았다. 마침내 정부에서는 이들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를 1870년(고종 7)에 건립하였다.

[가계]

문희석남평 문씨 시중공파로서 시조 문다성의 37세손이고, 남평 문씨 시중공파 옥구 입향조 문헌(文獻)의 12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문도필(文道弼)이고, 할아버지는 문성두(文星斗)이며, 아버지는 문치순(文致舜)이다. 외할아버지는 조기인(趙器寅)[본관 김제] 혹은 완산 최씨이며, 장인은 통덕랑을 지낸 서병옥(徐秉玉)[본관 연산]이고, 후처의 아버지는 신여택(申汝澤)[본관 평산]이다. 문계인문희석의 증손자이다. 할아버지는 문명상이고, 아버지는 문박채(文朴采)이며, 외할아버지는 권연(權衍)이고, 장인은 김성추(金聖秋)이다.

[활동 사항]

문희석의 자(字)는 주경, 호(號)는 난유당이다. 1732년(영조 8)에 태어났고, 1771년(영조 47)에 사망하였다. 어머니가 편찮으시자 전주에서 약을 제조하여 오다가 어두워서 밤에 길을 잃어버렸는데 홀연듯 불이 밝혀져 길을 인도해 주었으며, 신창진을 건널 때 배가 없자 울며 호소하자 홀연히 배가 나타나 만경강을 건널 수가 있었고, 마침내 약을 먹고 어머니의 병이 쾌차하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가 산의 짐승을 먹고 싶다고 하자 갑자기 산에 사는 꿩 한 마리가 집안으로 들어와 즉시 어머니께 드렸으며, 어머니의 병이 위독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어머니 입에 넣어 드려 목숨을 연명해 드렸으며, 옷을 벗지 않고 항상 옆에서 간호해 드렸다.

문계인의 자(字)는 시화(時華)이며, 호(號)는 사암(思菴)이고, 효자 문희석(文希奭)의 증손이다. 1795년(정조 19)에 태어났고, 1862년(철종 13)에 사망하였다.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고 부모를 섬김에 지극한 효성을 다하였다. 부모가 병이 깊어 물고기와 채소가 먹고 싶다고 하자 구하기 힘든 엄동설한인데도 어렵게 물고기와 채소를 구해다 드렸으며, 돌아가심에 미치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처음과 끝이 다름이 없게 하였다. 시묘살이 이후에도 하루에 세 번 부모의 묘소를 돌보아 드렸으며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문희석문계인의 효행이 널리 알려지자, 도내 유생들이 천거하여 포상할 것을 주장하였고, 1870년(고종 7)에 정부에서는 문희석문계인의 정려를 세울 것을 명령하였다. 당시 세워진 문희석문계인의 정려가 군산시 회현면 고사리 대위 마을에 지금도 남아 있다.

[묘소]

문희석문계인의 묘는 전라북도 군산시 회현면 고사리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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