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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948
한자 崔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두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36년연표보기 - 최호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76년 - 최호 무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97년 - 최호 무과 중시(重試) 장원급제
활동 시기/일시 1592년 9월 - 최호 함경도 병마절도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96년 4월 9일 - 최호 충청도 수군절도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96년 - 최호 이몽학의 난 진압
몰년 시기/일시 1597년 7월 16일연표보기 - 최호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04년 - 최호 청난 공신 2등 책봉
추모 시기/일시 1615년 - 최호 임난공신록 추록
출생지 최호 출생지 - 전라북도 군산시
사당|배향지 최호 사당 : 충의사(忠義祠) -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면 원발산길 33-2[발산리 421]지도보기
성격 무관
성별
본관 경주
대표 관직 함경도 병마절도사|충청도 수군절도사

[정의]

조선 전기 군산[옛 임피현] 지역 출신의 무관.

[개설]

임피현에 세거한 경주 최씨 출신인 최호(崔湖)는 1574년(선조 7)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2년 후인 1576년(선조 9) 무과 중시에서는 장원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무관직을 거친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에는 함경도 병마 절도사와 충청도 수군절도사가 되었으며,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여 청난공신 2등에 책봉되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일본군과 싸우다가 원균, 이억기 등과 함께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가계]

최호경주 최씨 시조 최치원(崔致遠)의 16세손이고, 경주 최씨 임피 입향조이자 이조 좌랑을 지낸 최근운(崔墐雲)의 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증직(贈職)으로 통정 대부 사복시 정을 수여 받은 최신노(崔信老)이고, 할아버지는 증직으로 통정대부 장예원 판결사를 수여받은 최유간(崔有簡)이며, 아버지는 경흥 진관 조산포 병마 만호, 평안도 병마 우후 등을 지낸 최한정(崔漢禎)이다. 외할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김계옥(金繼玉)[본관은 광산]이고, 장인은 현령을 지낸 김고(金皐)[본관은 광산]이다.

[활동 사항]

최호는 1536년(중종 31)에 태어나, 1597년(선조 30)에 사망하였다. 38세 때인 1574년(선조 7)에 무과에 응시하여 병과 5인(人)으로 급제하였다. 급제 당시 최호의 관직은 정로위(定虜衛) 현신교위(顯信校尉)였다. 최호의 무과 홍패는 1990년에 편찬된 『옥구 군지(沃溝郡誌)』에 실려 있다. 2년 후인 1576년(선조 9)에는 무과 중시(重試)[현직 무관들 중에 무예가 출중한 사람들이 10년마다 응시하는 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당시 최호의 관직은 전 권지 훈련원 봉사 수의 부위(前權知訓練院奉事修義副尉)였다. 무과 중시에 급제한 이후 최호는 선교랑(宣敎郞)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를 거쳐, 1577년(선조 10) 3월에는 품계가 선교랑[종 6품 동반 품계]에서 승훈랑(承勳郞)[정6품 동반 품계]으로 한 등급 올라갔다.

이후 내금위(內禁衛) 충의 교위(忠義校尉)를 거쳐, 1579년(선조 12) 8월에는 과의 교위(果毅校尉)에, 1년 후인 1580년(선조 13) 정월에는 절충 장군(折衝將軍) 강계 진관 추파참형 만호(江界鎭管楸坡參亨萬戶)에, 다시 1년 후인 1581년(선조 14년) 정월과 3월, 그리고 12월에는 각각 조봉대부(朝奉大夫) 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 조봉대부(朝奉大夫) 강진 현감(康津縣監), 조봉대부(朝奉大夫)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에, 1584년(선조 17) 2월에는 보공 장군(保功將軍) 종성 진관 방탄 병마 만호(鍾城鎭管防坦兵馬萬戶)에, 1587년(선조 20) 10월 초에는 중직대부(中直大夫)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와 중직대부(中直大夫) 무안 현감(務安縣監)에 각각 임명되었고, 1588년(선조 21) 4월에는 무안 현감(務安縣監)으로 있으면서 관품이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랐다.

1589년(선조 22) 7월 20일에는 어모 장군(禦侮將軍)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에, 그 해 9월 10일에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용강 현령(龍崗縣令)에, 그 달 17일에는 오위도총부 도사(五衛都摠府都事)에 각각 임명되었다. 오위도총부 도사에 임명된 지 3년만인 1592년(선조 25) 9월에 최호는 함경도(咸慶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5개월 정도 지난 뒤였다.

1593년(선조 26) 10월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최호는 고향으로 돌아와 곧바로 아버지의 상을 치렀다. 3년 상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594년(선조 27) 7월에 선조의 부름을 받고 다시 함경도 병마절도사(咸慶道兵馬節度使)에 복직하였다.

최호는 복직 후 여진족의 감파보 침입을 막지 못하여 조정으로부터 견책을 받기도 했지만 1594년 삼수와 갑산 지역의 여진족 침입을 막기 위해 가을파지보(茄乙波知堡)에 개시(開市)를 허락하여 약 10여 년 동안 함경남도 일대에 여진족의 대규모 약탈은 사라지게 되었다.

1596년(선조 29) 3월 20일에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었고, 4월 9일에는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다 1596년 홍가신, 박명현, 임득의, 신경행 등과 함께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청난공신(淸難功臣) 2등 공신에 책봉되었다[1604년].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일본군과 싸우다가 칠천량 해전에서 1597년(선조 30) 7월 16일에 이억기 등과 함께 하난도에서 순절하였다.

[묘소]

최호의 처(妻) 묘가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반월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최호는 사후에 계성군(鷄城君)으로 봉군되었고, 시호로 충원공(忠元公)을 받았다. 정려도 내려졌다. 1615년(광해군 7) 찬집청(撰集廳)의 주청으로 임난공신록에도 추록되었다. 현재 최호와 직계 후손들의 고문서 42점이 전해오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0.07.03 내용 수정 조선 후기를 조선 전기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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