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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487
한자 水利組合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표 시기/일시 1917년 - 「수리조합령」 발표
설립 시기/일시 1908년 - 옥구 서부 수리조합 설립
설립 시기/일시 1909년 - 임익 수리조합 설립
설립 시기/일시 1909년 - 임익 남부 수리조합 설립
설립 시기/일시 1911년 - 임옥 수리조합 설립
병합 시기/일시 1920년 - 임익 남부 수리조합와 임옥 수리조합를 병합하여 익옥 수리조합 설립
건립 시기/일시 1920년 2월~1923년 6월 - 전주군 운암산 중턱 대야리에 콘크리트 댐 건립

[정의]

개항 이후 군산 지역에서 일본인의 농장 개설과 함께 추진된 수리 사업을 했던 기관.

[일제의 수리 정책]

일본은 한국에 자국의 식량·원료 공급지, 상품 판매 시장의 역할을 강요했다. 그 중 자국의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한국에서 중점을 두었던 것은 농사 개량과 관개 수(水)의 확보였다. 그런데 개별 농장 단위로 농사 개량은 추진할 수 있었으나 관개 시설을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관개 수(水)의 확보책으로 기존의 수리 시설을 활용하기 위하여 기존의 제언(堤堰)·보(洑)를 조사한 후 보조금을 지급하여 복구, 수축하도록 하였다. 1909년(융희 3) 조사에 따르면 전라북도의 제언(堤堰) 516개와 보(洑) 766개 중에서 옥구부 14개, 임피군 21개가 있었고 1910년(융희 4) 옥구부가 470원, 임피군이 430원의 보조금을 받아 옥구의 미제, 선제, 백석제, 대위제와 임피의 관정제, 거산제, 도암제, 옥곡제, 수축제 등을 수축하였다.

이러한 제언(堤堰)·보(洑)의 복구, 수축 사업은 기존 수리 시설과 관개답(灌漑畓)을 대상으로 한 만큼 조선인 지주의 토지가 중심이 되었을 뿐 아니라 넓은 면적으로 관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주로 방대한 천수답(天水畓)이나 황무지를 매입하여 대농장을 소유하고 있던 일본인 지주들은 새로운 수리 시설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인 지주들은 일본의 수리조합 조직을 이식하고 수리조합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수리조합 사업에 일제는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급속하게 독점 자본 주의로 발전해 가던 일본 자본 주의는 농공 불균등 현상으로 인해 1918년 ‘쌀 소동’으로 표출되는 식량 부족과 높은 쌀 가격에 직면했다. 일제는 저임금과 저곡가를 기반으로 한 일본 자본 주의의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려고 일본 내에서는 「개간 조성법(開墾造成法)」 등을 추진하는 한편 조선과 대만에서 미곡 증산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일제는 여전히 미곡 증산의 최대 장애로 여겨졌던 관개 용수의 불안정성을 해결 해야만 했다. 수리조합 설립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1917년 「조선 수리조합령」과 「조선 수리조합 시행 규칙」을, 1919년 수리조합 자금의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수리조합 보조 규정」을 제정하여 수리조합에 대한 감독과 지원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수리조합 설치는 소토지 소유자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토지를 소유한 소수가 설립할 수 있었고, 수리조합 설립 추진자에게 토지 측량·조사권과 수리조합에 조합비 강제 징수권을 부여하였다. 또한 부윤·군수·도사-도장관-조선 총독으로 이어지는 3중의 감독 체계를 만들어 조선 총독부의 관리 감독 체계를 강화함으로서 조선 총독부가 수리조합의 운영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 시대와는 달리 수리 시설의 규모가 크고 근대적인 시설로서 면모가 크게 달라졌다. 물론 수리 사업은 우리의 농업 발전과 근대화를 위해서라기보다 미곡 증산을 통해 보다 많은 미곡을 착취하기 위한 식민지 통치 수단에 불과하였다.

[군산 지역 수리조합의 설립과 발전 과정]

군산 지역의 수리조합은 일찍이 1908년(융희 2) 옥구 서부 수리조합, 1909년(융희 3) 임익 수리 조합, 1909년(융희 3) 임익 남부 수리조합, 1911년 임옥 수리조합 등 4개의 수리조합이 집중적으로 설립되었다. 1917년 「수리조합령」이 발표되기까지 전국적으로 설립된 14개 수리조합 중 군산 지역에서 4개를 차지하는 것은 이 지역에서 초기부터 수리조합 사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들 수리조합은 기존의 수리 시설을 최대한 활용하거나 수원이 없어 구역 밖에서 물을 끌어 사용하였다. 옥구 서부 수리조합임익 수리조합은 기존의 수리 시설을 최대한 활용하였고, 임익 남부 수리조합임옥 수리조합은 수원이 없어 구역 밖에서 물을 끌어 사용하였다.

만경강(萬頃江) 중하류에 위치한 임익 남부 수리조합임옥 수리조합은 상류에서 개간이 진행되면서 물 부족 상황이 심각해졌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두 조합이 합병하여 1920년 익옥 수리조합을 탄생시켰다. 익옥 수리조합은 전주군 운암산 중턱 대야리에 콘크리트 댐을 쌓아 자체 수원지로서 저수지를 만드는 ‘조선 최대의 대공사’를 진행했는데, 방대한 공사였던 만큼 1920년 2월부터 2년 예정으로 시작된 공사는 1923년 6월에야 완공되었고 저수 후 방류에 의한 저수지 건설의 실제 효과는 1929년 이후에 가능하였다.

[수리조합 반대 운동]

수리조합 설치로 인해 기존의 수리시설과 관개답(灌漑畓)이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반대 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임익 수리조합의 경우 수원지인 요교제와 주변의 토지는 조합 설치 전 최고의 양답(良畓)이었기 때문에 저수지로 편입되는 것에 반발하고 소유주들이 총독부에 청원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조합측은 지주들의 대항에 「토지 수용령」으로 대응하였고 조합 설립에 앞장섰던 일본인 소유지는 관개 구역의 중심지가 되어 최고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1.01.25 정의 수정 항 이후 군산 지역에서 일본인의 농장 개설과 함께 추진된 수리 사업을 했던 기관 보(洑)
2019.08.09 임익남부수리조합 설립년도 오류 수정 1910년 -> 19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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