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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479
한자 農民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원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1년 8월 27일 - 조선 소작인 상조회 설립
설립 시기/일시 1922년 3월 - 조선 소작인 상조회 익산 지회 설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1년 - 만주 사변 발발
전개 시기/일시 1931년 - 『동아 일보』 군산에서 브나르도 운동 전개
진행 시기/일시 1931년 7월 3일~8월 4일 - ‘브나르도 운동’은 조선 어학회와 합동으로 문맹을 낮추기 위한 조선어 강습회 개최를 목적으로 군산 미우 구락부(群山米友俱樂部) 회관에서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6년 - 중일 전쟁 발발
성격 농민운동

[정의]

일제 강점기 일제의 수탈적 농업 정책에 반대하며 농민의 권익 회복과 민족 독립을 위해 전라북도 군산에서 농민 및 농민 단체를 중심으로 전개된 운동.

[일제 강점기 농업 정책]

일제는 1910년대 조선 토지 조사 사업, 1920년~1930년대 초반에 걸친 산미 증식 계획, 1930년대 중반 농촌 진흥 운동 등의 농업 정책을 한국에서 실시하였다. 이러한 농업 정책의 실행 목적은 식민지 지주제의 형성과 그를 통한 농업 수탈이었다.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해 지주 소작농 사이에 반봉건적 지주 관계를 형성하고, 산미 증식 계획과 농촌 진흥 운동을 통해 미곡 생산량을 늘려 식량난 해소와 자본가의 이득을 보장하였다.

일제의 농업 정책으로 일본인 지주들은 한국 농촌으로 농업에 대한 투기 및 농업 이민을 올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특히 군산은 곡창 지대를 배후로 가지고 있으며 일본으로 미곡 이출에 유리한 지리적 환경으로 일본인 지주들이 집중되었다. 그로인해 군산에는 일제 강점기동안 불이 농촌(不二農村), 웅본 농장(熊本農場)·삼국 농장(森菊農場)과 같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대농장들이 설립되었다.

일본인 지주가 경영했던 농장들에서는 고율의 소작료·소작권 이동·제반 비용을 소작인들에게 전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군산 지역 농민들은 일제의 농업 정책과 그에 기반한 지주들의 수탈에 반대하며 생존권 확보를 위한 농민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3·1 운동 이후에는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농민운동 단체가 조직되어 정치적 투쟁인 민족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모습으로 농민운동이 변화되어 갔다.

[1920년대 초 조선 소작인 상조회 군산 지부 결성과 활동]

1910년 토지 조사 사업으로 인해 토지에서 이탈된 소작인들은 지주에게 더욱 예속되었다. 1920년에 들어서는 산미 증식 계획으로 인한 강제 생산과 수탈로 소작인들의 삶은 더 고단해져 가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소작권을 담보로 한 고율의 소작료와 수리 조합비 등은 소작인에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군산 지역 지식인과 청년들은 1922년 이후 조선 소작인 상조회 군산 지회(朝鮮小作人相助會 群山支會)와 같은 소작인 단체를 조직하여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 소작인 상조회는 1921년 8월 27일 친일 인사 송병준이 참정권 획득과 소작인의 항일 의식 무마를 위해 설립한 단체였다. 하지만 전국 각지에 지회가 설립되면서 설립 목적과 달리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공존 경영이라는 구호를 표방하며 농민들의 이익을 위한 농민 단체로 변화해 가기 시작하였다. 3·1 운동 이후 사회 주의 사상을 접한 지식인들이 지회의 지도자로 등장하며 소작인 상조회의 성격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 소작인 상조회 군산 지회는 익산 지회가 설립된 1922년 3월 이후 설립되었다. 사회 주의 지식인과 마을 청년 및 유력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소작인의 경제적 이익 확보를 위한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농민들의 계몽을 통한 권익 확보를 위해 야학 교육, 강연회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지주들의 부당한 소작권 이동을 반대하며, 정당한 상황이 아니면 지주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지주들이 자신들의 요구에 불응하는 경우에는 소작료 불납 동맹을 만들어 지주에 대항하였다.

[1920년 중반 이후 청년 단체의 농민운동과 옥구 소작 쟁의]

1920년대 초 조선 소작인 상조회 군산 지회 활동 이후 1920년 중반부터 군산 지역 농민운동은 그 영향을 받고 설립된 농민 조합과 청년 단체들이 주도하였다. 군산 지역 청년 단체인 군산 교인 부인회, 기독 여자 청년회, 군산 미선회 등에서는 강연회, 토론회, 야학 개설, 빈민 구제 활동을 통해 농촌 계몽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이들 단체에서는 야학 교육에 집중하며 문맹 타파와 독립 사상을 고취하였다. 지역 유지들도 청년 단체와 같이 일신 야학, 합성 야학원 등을 개설하여 농민 계몽 운동에 동참하였다.

청년 단체의 활동과 함께 서수 농민 조합과 같은 농민 조합은 일본인 지주의 수탈에 반대하는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농민층을 지지했던 농민 조합은 지주의 입장에 있는 소작인·개량 조합과 맞서며 일본인 지주의 수탈에 반대하였다. 일본인 지주 이익과 미곡 증산을 위해 설립되었던 임옥 서부 수리 조합·임옥 수리 조합·동진 수리 조합과 같은 수리 조합 철폐를 요구하였다. 특히 옥구 이엽사 농장(二葉社農場)의 높은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며 농민들과 함께 옥구 소작 쟁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청년 단체와 농민 조합 이외에 군산 지역 각 면(面) 유지들은 면민 대회를 개최하여 소작농에게 부과된 강제 부역을 반대하였고, 이를 추진했던 면장을 배격하는 활동을 펼쳐나갔다.

[1930년대 이후 군산 지역 농민운동]

1931년 만주 사변, 1936년 중일 전쟁이 발발되는 정세 속에서 일제는 전쟁 수행을 위해 한국을 식량 공급 기지로 삼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농촌 진흥 운동을 실시하여 생산량을 늘리고, 이를 반대하는 농민운동을 강하게 제압하였다. 그 결과 농민 조합과 청년 단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군산 지역 농민운동은 탄압과 훼방으로 활동이 위축되었다. 이를 대신하여 개량주의적 성격의 농민운동이 언론사와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1930년 이후 전개되었다.

『동아 일보』는 1931년 여름 군산에서 ‘브나르도 운동’을 전개해 문맹을 퇴치하고자 했다.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브나르도 운동’은 조선 어학회와 합동으로 문맹을 낮추기 위한 조선어 강습회 개최를 목적으로 하였다. 군산에서는 1931년 7월 3일부터 8월 4일까지 군산 미우 구락부(群山米友俱樂部) 회관에서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 되었다. 또한 천도교 계열의 조선 농민사 군산 지사에서도 농민 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 농민사 군산 지사에서는 농민 계층을 조직화하여 조직망을 갖춘 다음 농민 경작 운동, 농민 생활 향상과 이익 확보를 위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평가와 의의]

일제 강점기 군산에서 진행된 농민운동은 일제의 식민 농업 정책에 대항하며 경제 권익 확보를 위한 투쟁에 머물지 않고, 민족 독립을 향한 항일 운동의 성격으로 변화해 가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 농민운동은 사회주의 영향을 받은 청년 단체와 농민 조합의 영향아래 진행되었다. 사회 주의의 영향으로 농민운동을 전개한 단체가 초기 소규모 소작인 조합에서 청년 단체와 농민 조합으로 확대 개편되는데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1930년 이후 전시 수탈 체제로 들어서면서부터 군산 지역의 농민운동은 탄압을 받아 위축되었고, 일제의 수탈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기보다는 개량주의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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