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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477
한자 獨立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원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7년 3월 13일 - 군산 객주 상사내에 국채 보상소 설립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6일 - 군산 지역 3·1 운동 전개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22일 - 군산 공립 보통 학교 방화
활동 시기/일시 1921년 1월~5월 - 광복회 군산 지회 회원 우재룡과 군자금 모집 활동
파업 시기/일시 1924년 3월 16일 - 낙합 정미소 매가리공 파업
파업 시기/일시 1925년 12월 25일 - 군산 철도 노동회 파업
설립 시기/일시 1927년 6월 12일 - 신간회 군산 지회 설립
발생 시기/일시 1927년 11월 24일 - 옥구 소작 쟁의 발생
사건 시기/일시 1934년 7월~11월 - 옥구 지역 소작 쟁의
성격 독립운동

[정의]

일제 강점기 일제의 무력 탄압으로부터 벗어나 민족 독립을 위해 전라북도 군산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민족 운동.

[개설]

군산은 금강과 서해안에 인접한 지리적 환경과 김제·만경·정읍 등의 호남 평야 지대를 끼고 있어 일찍부터 미곡을 중심으로 한 각종 산물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고 군산항이 개항된 이후부터 이러한 환경은 일제의 수탈과 침략을 위한 좋은 여건이 되었다.

개항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각국 거류지회에는 일본인 농장 지주, 관리, 상인 등이 몰려들게 되었고, 이는 기존 군산 지역에 거주하는 농민과 상인들에게는 큰 피해로 돌아왔다. 일본인 지주와 상인들은 조선 총독부의 지원 아래 군산 지역 토지를 강제로 수탈하여 생산된 미곡을 일본으로 이출하는데 집중하였다. 그 결과 토지에서 유리된 군산 지역 주민들은 일제 강점기 동안 삶의 터전을 잃고 어려운 삶을 살아야만 했다.

군산에서는 일제의 이러한 수탈과 탄압에 반대하는 모습이 강제 병합을 전후하여 나타났다. 1907년(융희 1) 의병 전쟁과 객주가 중심이 되어 전개된 국채 보상 운동을 시작으로 1919년에 3·1운동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1920년대에는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연대 파업과 소작 쟁의 등과 같은 다양한 항일 독립운동으로 나타났다.

[대한 제국 말 군산 지역 국권 회복 운동]

대한 제국 말 우리나라에서는 단발령 실행, 고종 황제 강제 퇴위, 외교권·사법권 강탈 등 일제의 야만적이고 무력적인 행동에 대해 반대하는 의병 활동이 1895년(고종 32)을 전후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군산에서는 동학 농민 전쟁의 영향으로 처음부터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지는 못하였지만, 남광원(南光元)·김동구(金東九)·김막동(金莫同)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이 전개되었다. 남광원·김동구·김막동 등은 일본인에 대한 암살 및 행정 시설 파괴 등 수탈과 침략에 대항하는 첨병 역할을 수행하는 모든 것을 목표로 삼았다. 또한 옥구 출신 임병찬(林炳瓚)최익현(崔益鉉)과 함께 태인 의병을 일으켜 국내 의병 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군산 지역 객주들은 통감부의 통제와 일본 상인의 침투가 가속화 되어 지역 상권이 침탈 받게 되자, 군산 객주 상회사(群山客主商會社)와 군산항 신상 회사(群山港紳商會社)와 같은 객주 상회사를 조직하여 대응해 나갔다. 1907년(융희 1) 국채 보상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의연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펼쳐나갔고, 1909년(융희 3) 10월에는 호상관 상회(湖商館商會)를 창립하여 상업과 교육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객주 상회사 소속이었던 김석현(金錫玄), 김홍두(金洪斗) 등은 대한 협회 군산 지회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계몽 운동도 전개하였다.

[1910년대 군산 지역 독립운동]

1910년대 군산 지역 독립운동은 대한 제국기에 진행되었던 의병 활동과 계몽 운동에서 추구한 국권 회복 운동을 계승·발전시켜 나갔다. 의병 활동은 일제의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말미암아 국외로 이동 및 비밀 단체를 만들어 활동할 수밖에 없었고, 의병에서 독립군으로의 변환을 모색하였다. 중기 의병 때 큰 활약을 펼친 임병찬은 이런 상황에서 1913년 정철하·김현각 등과 회합하여 군산에 대한 교민 광선회(大韓僑民光鮮會)라는 비밀 단체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을 모색하였다. 임병찬은 이 단체를 통해 국외 서간도에 있는 광제회와 연결하여 독립운동 참여자 규합 및 군자금 모집에 착수하고자 하였다. 또한 고종의 밀지를 받고 임병찬이 설립한 독립 의군부(獨立義軍府)에 옥구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김덕장(金德長)·문형모(文亨模)·이준영(李俊榮)·전오풍(田五豊) 등이 참여하였다.

1919년 전국적으로 전개 된 3·1운동에서 군산 지역은 영명 학교, 멜보딘 여학교, 알락 소학교 등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학교의 교사와 학생, 구암 교회 교인, 일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들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받은 군산 공립 보통 학교 학생 김수남(金壽男)·이남률(李南律) 등은 일본인 교장으로 인해 3·1 운동을 참여하지 못하게 되자 군산 공립 보통 학교에 방화를 하고 3·1 운동에 동참 하였다. 이러한 독립운동 열기는 인근 옥구와 임피 지역에 그대로 전해져 장이 서는 날 대규모의 만세 시위 운동이 전개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1920년대 군산 지역의 독립운동]

3·1 운동 이후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통치가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바뀌고, 국외에서 유행하였던 사회주의가 독립운동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 국내에 유입되게 되었다. 사회주의 사상은 지식인을 중심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특히 민족적 모순에 고통을 받고 있던 노동자·농민 등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처한 계층은 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였다.

일제의 수탈과 민족적 차별이 심했던 군산에서도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었고, 그로 인해 노동 운동·농민 운동이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진행되었다. 노동 운동은 군산 노동 공제회·군산 노동 연맹회·군산 미선 조합·군산 철도 노동회 등의 단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들 노동 단체는 노동자들의 소양 함양을 위해 야학 운영 및 강연회를 개최하였고, 일본인 자본가의 차별과 억압에 맞서 파업 활동을 전개하였다. 농민 운동에서는 일본인 지주들의 지나친 간섭과 통제, 높은 이율의 소작료, 비료대·지세·운반비 등 제반 비용에 대한 전가에 반대하며 소작 쟁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27년 11월 서수 농민 조합을 중심으로 진행된 옥구 소작 쟁의는 일제의 식민 수탈 체제에 대항한 항일 농민 운동의 특징을 잘 보여준 사례였다.

한편 이외에 1920년대 군산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으로는 광복회(光復會) 회원으로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하여 전라북도 지방에서 활동을 했던 우재룡(禹在龍)[일명 우리견]이 군산 광복회 회원들의 도움을 받아 독립 운동 자금을 모집한 사실이 있다. 또한 조용관(趙容寬)·차주상(車周相)·홍종익(洪鍾翊)·김홍두(金洪斗) 등과 같은 좌우익 세력은 서로 힘을 합쳐 신간회 군산 지부를 1927년 6월 12일 창립하였다. 이들은 신간회 군산 지회를 통해 연합된 힘으로 독립운동 활동을 전개해 나가고자 하였다.

[1930년 이후 군산 지역의 독립운동]

1930년대 군산 지역의 독립운동은 1920년대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이 1930년대 초·중반까지 이어지는 가운데 학생 운동과 군산 지역 출신 인사의 해외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노동 운동은 군산 지역 주요 정미소인 가등(加藤) 정미소·장전(長田) 정미소·화강(花岡) 정미소·조선(朝鮮) 정미소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일본인 공장주들은 경제 공황에 따른 경제적 손실과 만주 사변 이후 침략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노동자들에게 전가하였다. 정미소 노동자들은 공장주들의 생산 도구로 전락되어 민족적 차별과 탄압을 감당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민족적 차별과 탄압에 그대로 노출되었고, 이를 극복해 내기 위해 일본인 공장주를 상대로 연대 파업을 통한 노동 운동을 전개하였다. 농민 운동에서도 1920년대 말 옥구 소작 쟁의의 영향으로 농민들의 소작 쟁의가 1930년대 초반까지 옥구를 중심으로 이어졌다.

학생 운동은 1929년 광주 학생 운동의 영향을 받았는데, 1930년 군산 공립 고등 여학교 김귀선(金貴先)이 민족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학생 운동을 준비하다 검거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1920년대까지 옥구 축산 협동 조합(沃溝畜産協同組合)에 근무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했던 조수완(趙守完)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1932년 중국 천진에서 의열단에 참여하여 무력 독립운동을 돕기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의의와 평가]

군산 지역 독립운동은 지역 문제가 민족 문제와 연관되면서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일본인 자본가와 지주들이 집중되었던 일제 강점기 군산은 노동자, 농민이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문제 해결을 위해 전개된 노동 운동·농민 운동은 지역 문제를 넘어 민족 문제와 연관되어 독립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4.10.20 항목명 수정 독립 운동->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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