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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참기지화 정책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476
한자 兵站基地化政策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원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치 시기/일시 1922년 - 자명회 설치
개칭 시기/일시 1932년 11월 - 자명회에서 아동리 농촌 진흥회로 개칭
공포 시기/일시 1934년 6월 20일 - 조선 시가지 계획령 공포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7년 - 중일 전쟁 발발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8년 2월 24일 - 지원병 제도 실시 결정
공포 시기/일시 1938년 3월 23일 - 「육군 특별 지원 병령」 공포
성격 수탈 정책

[정의]

1930년~1945년 일제가 대륙 침략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며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수행한 정책.

[개설]

1920년대 중반부터 중국에서 반제 항일 운동이 발발하고 중국에 대한 이권을 위협받게 된 일제는 군부를 중심으로 이권을 지키기 위해 중국 본토를 침략하기에 이른다. 일본 국내에서는 군부의 발언권이 강화되며 천황제 파시즘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와 함께 침략 전쟁 수행을 위해 한국을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 기지로 개편하고 인력과 물자의 수탈·동원 체제를 구축하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병참기지화 정책은 한국 내의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해 전쟁 과정에서 활용하는 것이 목적이다. 병참 기지화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일본은 내선 일체를 강요하며, 이전보다 강력한 사상 통제를 실시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 이후에는 전쟁이 장기화 되자 한국·일본·만주·중국·남양 군도를 하나로 묶어 대동아 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형성하고 국방과 전쟁을 최우선으로 하였다. 이때 한국은 병참 기지로서 역할이 더욱 강조되었다.

병참기지화 정책으로 한반도 북쪽 평양·흥남·신의주 등은 경공업을 바탕으로 전쟁에 필요한 군수 물품을 생산해낼 수 있는 시설을 집중시키고, 군산·목포 등 남쪽 지역으로는 미곡, 잡곡, 면화, 가축 등의 생산량을 늘리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진행되면서는 징용·징병·공출을 통해 전쟁에 필요한 병력, 물품, 노무자를 충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일제의 침략 전쟁이 본격화 되는 1930년 이후 군산에서도 전쟁 수행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병참기지화 정책들이 실행되었다. 전시 식량 공급을 위한 목적으로 농촌 진흥 운동과 자력 갱생 운동이 실시되었고, 방직 공장이 설립되어 군수 물품을 생산하였고, 공장 가동에 도움을 주기 위한 발전소 시설이 정비되었다. 또한 태평양 전쟁에 들어서면서는 학도병·근로 보국대에 차출되어 전쟁과 노역에 동원되었고, 시가지 계획에 의해 주요 도로와 교통망 등이 전쟁 수행에 맞게 정비가 이루어졌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전쟁 수행 과정에 필요한 식량·의복 보급 및 기타 독자적 생산 기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군산을 개발하여 병참 기지로 사용하고자 한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내용]

1. 전시 식량 확보를 위한 농촌 진흥 운동

농촌 진흥 운동은 총독에 의해 실시되었다. 이 운동은 농민의 생활 안정, 행복한 가정 조성을 바탕으로 충량한 신민으로 국가와 사회에 필요한 한국인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농촌 진흥 운동의 실현 방법으로는 식량 자급 자족, 부채 정리, 농민 교육, 근로 정신의 배양, 부녀자의 옥외 노동 실행, 소비 절약, 잉여 노동력 활용, 부업 증진, 정신 작흥 등을 내세웠다. 이를 통해 일제는 식민지 한국인들로부터 안정적 생산력을 확보하여 침략 전쟁에 필요한 식량을 공급받고자 했다.

군산에서 농촌 진흥 운동은 개정면 아동리 농촌 진흥회(阿東里農村振興會)와 회현면 원우리 농촌 진흥회(院隅里農村振興會)를 통해 실시되었다. 아동리 농촌 진흥회는 1931년 12월 28일 설치되었으며, 미곡과 면(綿) 생산량 증가, 식량 자급 자족을 주목적으로 운영되었다. 부업으로 양장·양봉 및 소를 사육하였고, 술과 담배를 줄이고 색의(色衣) 착용할 것을 교육하였다. 또한 관혼 상제비 절약, 노동 시간 연장, 부녀자 노동 참여, 저축 등 농민들의 절약과 근로 보국을 강조하였다. 황국 신민으로 교육하기 위해 일본 국기 보급과 정신 교육을 실시하였다. 하부 단체로 아동리 농촌 진흥 청년회와 부인회를 갖추고 있었다. 원우리 농촌 진흥회는 1922년 서택수(徐宅水)·강창기(姜昌起)·문찬선(文撰善)이 민풍 개선(民風改善)과 산업 장려를 목적으로 설립한 자명회(自明會)가 바탕이 되어, 1932년 11월 원우리 농촌 진흥회로 개칭되었다. 모범 부락으로 지정되어 미곡, 보리, 대두를 중심으로 생산했으며, 아동리 농촌 진흥회와 마찬가지로 근로 보국과 황국 신민의 정신을 갖추기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농촌 진흥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농촌 진흥 운동의 결과 군산의 농촌은 이전보다 심하게 지주에게 토지가 집중되었고, 소작농이 많아지게 되었다. 이는 본래 목표로 했던 농촌 생활 안정과는 거리가 먼 결과였다. 이와 같은 결과가 나온 배경으로는 농촌에서 생산된 농산물들이 농민들을 위한 것이 아닌 침략 전쟁 수행과 지주들의 이윤 확보를 위해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삶의 기반을 잃은 소작농들은 군산 시가지로 몰려들어 토막민으로 삶을 영위해야 했다. 토막민 증가로 인한 실업률 증가와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일제는 직업 소개소를 통해 북쪽의 공업 지대로 토막민 등을 이동시켜 병참기지화에 필요한 노동력으로 이용하였다.

2. 군수 공업화를 통한 공업 원료 수탈

일제는 만주 침략 개시 이후 침략 전쟁 수행을 위해 한국에서 식량, 광산물 등의 공업 원료와 금속, 화학, 방적 등 군수 공업을 강화하였다. 또한 유사시를 대비하여 남면북양(南綿北羊)의 기조 아래 남쪽은 면화를 북쪽은 면양을 사육할 계획을 세워 착수하였다.

군산에서는 북쪽의 공업 지대와 같이 군수품을 생산해 내는 군수 공장이 많지는 않았지만, 저렴하고 풍부한 노동 시장과 농촌 진흥 운동을 통해 생산된 면을 처리하기 위한 방적 공장이 운영되었다. 자본가의 투자로 방적 공장 구라시키 인견 회사[倉敷人絹會社] 군산 공장이 설립되어 군복 제작에 필요한 면을 가공하였다. 중일 전쟁 이후에는 군수품을 생산해 공장에 안정적 공업 용수와 전력 공급을 위해 남조선 전기 주식 회사(南朝鮮電氣株式會社)·군산 화력 발전소(群山火力發電所)가 뒷받침해 주었다.

3. 징병제를 통한 인적 자원 수탈

일제는 전쟁에 필요한 병력 확보를 위해 1938년 3월 23일「육군 특별 지원 병령」을 공포하고 4월 3일부터 시행하였다. 지원병들의 훈련을 뒷받침하기 위해 육군 훈련소를 설치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여 그 곳에 사람들을 강제 동원하여 전쟁에 참여케 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확대되었을 때는 근로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군수 물자 및 국방 시설 건설에 인력을 강제 동원하였다.

군산에서도 징병제 실시로 강제로 징용된 사람들이 제2 육군 훈련병 지원자 훈련소에 입소하여 6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훈련을 받고 현역 및 제1 보충역으로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입대 후에는 일제와 중국의 전전이 형성된 중국 지역으로 강제 동원되어 전쟁에 참여하였다.

4. 시가지 계획을 통한 방어기지 구축

1930년대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일제는 한국의 주요 도시를 대륙 병참 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시가지 계획을 추진하였다. 시가지 계획은 시가지 계획 구역 설정·토지 구획 정리·도로망·녹지 공원 지구 설정 등이 포함 되어 있었다. 1940년 태평양 전쟁에 미국의 참전으로 시가지 계획은 군사적인 측면이 강조되었다. 그로 인해 도시 내에 방공 도로와 방화실(放火室)이 설치되었고, 주요 건축물 위장 및 피난민 수용소가 건립되었다.

1938년부터 실시된 군산 시가지 계획은 군산 공업 단지 개발·외항 개설·금강 하류 체절(滯切) 공사·군산-장항 간 대교 가설 등으로 이루어 졌다. 군산 공업 단지 개발을 위해 부비(府費)로 약 165,289㎡의 땅을 매수하여 군수와 관련된 시설물 설립을 계획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발발에 따른 전선 확대로 군산은 1940년 11월 29일 방공 건축 규제 도시 예정지로 지정되었다. 그로 인해 군산 시가지 계획은 군부대 배치를 위한 토지 구획 정리, 비행기의 폭격에 대비한 공원 녹지 조성 등 방비 대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다.

[의의와 평가]

만주 사변 이후 실시된 병참기지화 정책으로 군산 지역은 전시 식량 확보를 위한 지역으로 변화되었다. 농산물을 중심으로 생산되는 모든 것은 강제로 공출되었다. 공업품 생산을 위한 공장이 설립·운영되기도 하였으나, 일제 독점 자본의 이식에 의한 식민지형 공업으로 전시 통제 경제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또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이후 전선이 확대되면서는 전시를 대비하기 위한 도시 계획이 실시되는 식민지적 특성이 나타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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