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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468
한자 國債報償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원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7년 2월 16일 - 국채보상운동 전개
종결 시기/일시 1910년 8월 29일 - 국채보상운동 종료
발단 시기/일시 1905년~1907년 - 통감부 설치 이후 시정개선 명목으로 일본으로부터 차관도입
전개 시기/일시 1907년 2월 22일 - 국채 보상 기성회 조직
전개 시기/일시 1907년 3월 13일 - 군산 객주 상사 내에 국채 보상소 설립
전개 시기/일시 1907년 4월 28일 - 군산 객주 상사 의연금 167원 78전 기탁
전개 시기/일시 1907년 6월 2일 - 군산항 신상 회사 1차 의연금 35원 80전 기탁
전개 시기/일시 1907년 8월 23일 - 군산항 신상 회사 2차 의연금 14원 70전 기탁
관련 인물/단체 김홍두|김봉규|오균섭|박영신|군산 객주 상사|군산항 신상 회사

[정의]

일본에서 빌린 차관을 갚기 위해 1907년~1908년 군산 지역 객주 상회사가 중심이 되어 전개한 운동.

[개설]

국채보상운동은 통감부 설치 이후 한국의 시정을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도입된 차관 1,300만원을 상환하기 위해 1907년(융희 1) 2월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황성 신문』·『대한 매일 신보』·『제국 신문』·『만세보』 등의 언론 기관과 대한 자강회·신민회·서우 학회 등 계몽 운동 단체들의 호응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게 되었다.

전국으로 확산된 국채보상운동은 군산에서도 전개되었다. 군산에서는 객주들이 중심이 되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객주들은 군산 객주 상사·군산항 신상 회사와 같은 상회사를 중심으로 의연금을 모금하여 서울의 국채 보상 기성회에 기탁하는 방식으로 국채보상운동에 동조하였다.

[역사적 배경]

1905년(광무 9) 통감부 설치 이후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대한 제국의 시정과 재정 개선에 착수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일본에서 메가다 쇼타로[目賀田種太郎]를 불러 재정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재정 고문으로 부임한 메가다는 대한 제국 재정을 일본에 예속시키고, 식민지 건설에 필요한 예산을 일본에서 차관을 도입하여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차관을 도입할 것을 대한 제국 정부에 강요하였고, 그 결과 여러 차례에 걸쳐 일본 정부와 금융 기관으로부터 많은 양의 차관이 들어오게 되었다.

대한 제국에 유입된 막대한 양의 차관은 일본 거류민을 위한 상수도 시설 구축, 일본인 관청 보수, 일본인 관리 봉급 지급, 도로·항만 시설 확충 등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시설에 소비되었다. 그 결과 원금만 1,650만원에 달하는 채무를 지게 되었고, 해마다 늘어나는 이자는 대한 제국 정부에 부담이 가중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경제적 침략으로 인해 민족 경제가 파탄에 이룰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위기 의식은 일본에서 도입한 차관을 상환하여 식민지 예속과 약탈에 대항하여 국권 회복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안을 필요로 하였다. 그 결과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어 국채 상환을 위한 노력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경과]

1907년(융희 1) 1월 29일 대구 광문사의 김광제(金光濟), 서상돈(徐相燉)이 국채 1,300만원에 대한 보상 문제를 제기한 이후 국채 보상 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907년(융희 1) 2월 22일 서울에 국채 보상 기성회가 조직된 후 국채보상운동은 본격화되었다. 뒤이어 국채 보상 단연 의무회·국채 보상 일심회·국채 보상 동정회·국채 보상 의무소·국채 보상 부인회 등 전국에 걸쳐 20여 개 이상의 단체들이 연이어 조직되어 의연금을 모금하기 시작하였다. 의연금은 단연(斷煙)·단주(斷酒)·절미(節米)·패물(佩物)을 통해 모금되었다. 『황성 신문』·『대한 매일 신보』·『제국 신문』·『만세보』 등의 언론사와 대한 자강회 기독교 청년회와 같은 사회 단체에서는 국채보상운동의 당위성을 알리는 취지문과 토론회 등을 개최하여 전 국민이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은 각 도에 국채 보상 의무회가 설립된 이후 각 군별로 의연 활동이 전개되어 나갔다. 전라북도에서도 국채 보상 의무회가 설립된 이후 각 군별로 퍼져나갔다. 전라북도에 설립된 보상회는 대부분 군수의 지원을 받은 전직·현직 하급 관리가 중심이 되었고 일반 민중들의 참여가 이어졌다.

반면 군산에서의 국채보상운동은 전라북도 다른 지역과는 달리 객주들이 주도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융희 1) 3월 13일 군산 객주 상회사(群山客主商會社)에서는 국채 보상 의무사를 조직한 후 참여를 호소하는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설립된 국채 보상 의무사는 보상 운동을 주도하면서 의연금을 모집하여 보관하고 있다. 중앙에 있는 총합소나 연합 회의소에 송금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군산의 또 다른 객주 상회사인 군산항 신상 회사(群山港紳商會社)에서도 군산 객주 상회사와 같이 국채보상운동에 동참을 하였다. 군산항 신상 회사에서는 총 2차례에 걸쳐 의연금을 모아 기탁하였다.

또한 이들 상회사 이외에 임피 지역에서는 일반 민중들이 개별적으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집남, 강기승, 채경원 등 임피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총 3회에 걸쳐 167명이 229원 42전을 모금하는 등 의연 활동을 전개하였다.

[결과]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위기감을 느낀 통감부에서는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던 배설·양기탁을 국채 보상금 횡령이라는 죄목으로 처벌하여 운동의 활력을 차단시키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국채 보상 연합 회의 소장을 역임한 김종환의 일진회 가입, 핵심 단체 강제 해산, 의연금 회령, 추진 주체의 취약성 등으로 동력을 잃게 되었다.

군산에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도 이와 비슷한 시기인 1907년(융희 1) 8월 군산항 신상 회사의 의연금 기탁 이후 활동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일제가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위기감을 느끼고 차단한 상황과 시기를 같이 한 것으로, 중앙의 실패가 군산 지역 국채보상운동 흐름에 그대로 반영된 결과이다. 그로 인해 군산에서의 국채보상운동은 광범위한 민족 운동으로 진전되지 못하고 좌절되었다.

[의의와 평가]

군산에서의 국채보상운동은 객주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다. 이는 전라북도의 다른 지역에서 관리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던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와 같은 차이는 이들이 상인으로서 경제 활동 종사를 통해 국채보상운동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다른 일반 민중 보다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군산 지역 객주들의 국채 보상 운동 참여는 일제에 대한 항일 구국 정신의 발현 및 자주적 상업 발전을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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