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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463
한자 客主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원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항 시기/일시 1899년 5월 1일 - 군산항 개항
발표 시기/일시 1907년 - 객주 14인 국채 보상 의무 취지서 발표
성격 상인 계층

[정의]

조선 후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군산 지역을 중심으로 미곡·어물 등 각종 물산을 위탁 판매 등의 역할을 담당했던 상인 계층.

[개설]

객주의 기원이나 연혁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객주란 객주 상인(客主商人)이라는 뜻이며, 주인이란 주선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다. 객주는 화물주(貨物主)에게 위탁 받은 상품을 판매함과 동시에 생산자에게 자금을 대여하고, 매매주나 화물주에게 숙박을 제공하여 상품 중개 거래를 편히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거나 물품을 보관 하는 등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객주는 조선 후기 장시가 전국적으로 개설되고 사람들의 많은 왕래와 상품 거래의 활성화로 인해 그 역할이 강조되었다. 특히 개항 이후 개항장을 중심으로 활동한 객주들은 생산·유통·판매처 확보를 통해 외국 상인의 국내 산업 침투에 대한 방어와 근대 상업가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개항 이전 군산 지역 객주의 모습]

조선 시대 군산은 호남의 평야 지대와 서해안에서 산출되는 농산물과 수산물의 집산되는 장소이자 조창인 군산창(群山倉)을 통해 집산된 세곡을 수송하는 지역이었다. 또한 조선 시대 3대 시장 중 하나인 강경 시장과 인접하고 있어 강경 시장의 발전을 통해 군산 지역 장시와 포구들이 동시에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특히 경포시(京浦市)와 경장시(京場市)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객주들을 중심으로 군산 지역 객주는 성장하여 나갔다.

군산 지역 객주에 집산되는 상품으로는 미곡·어염·목면·종이 등이 있었다. 집산된 물건들은 경성, 부산, 인천, 평양, 신의주, 안동, 목포 등지로 반출되었다. 이는 군산이 금강 수운을 기초로 하여 주변 지역에서 산출되는 생산물의 집하·배급 기능을 하는 유통지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또한 선상(船商)과의 거래를 통해 구문을 취하거나 유통세를 징수하여 많은 이득을 취할 수 있었고, 감영에 많은 양의 포세전(浦稅錢)을 상납하였다. 이와 같이 군산을 중심으로 한 객주들의 활동과 유통지로서 군산의 지리적 배경은 향후 상품 유통이 증가할 경우 금강 하구의 대표적 상업 지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군산항 개항과 객주의 성장]

대한 제국 정부는 1899년(광무 3) 5월 1일 군산항을 개항하였다. 군산의 개항은 이전의 1876년(고종 13) 부산, 1880년(고종 17) 원산, 1883년(고종 20) 인천 지역과 달리 외세의 개입이 없는 대한 제국 정부의 자율적 의지에 의한 개항이었다. 이 개항을 통해 군산은 작은 포구에서 항구로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게 되었고, 개항장을 중심으로 객주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획득하였다.

대한 제국의 군산항 개항은 식산 흥업(殖産興業)을 통해 근대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대한 제국 정부 의지가 담겨있었다. 이를 위해 군산항에 전관 조계지가 아닌 공동 조계지를 설정하여 일본 상인의 영향력 확대를 차단하고자 했다. 군산항을 중심으로 활동한 객주들도 상회사(商會社)를 설립하여 산업의 부흥 및 향후 일본 상인의 침투가 야기할 문제에 대해 대비하고자 하였다.

상회사 설립은 객주들의 노력뿐만 아니라 대한 제국 황실의 도움을 받아 전개되었다. 황실에서 상회사 설립을 장려한 배경에는 개항 이후 늘어난 정부 부처의 예산을 상업 과세를 통해 확충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객주들은 이전까지 객주과세를 통해 이윤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국가에서는 이를 무명 잡세라 하여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다. 하지만 대한 제국 정부에서는 이를 공식화하여 인정하고 내장원에 백일세(百一稅)를 납부케 하여 객주의 지위를 인정하고 재정 확충을 도모하였다. 이로 인해 객주의 공적지위가 확보되어 지방관과 토호로부터 수탈을 피할 수 있었고, 외국 상인에 맞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순흥사(順興社), 영흥사(永興社), 어염 회사(魚鹽會社), 어상 회사(魚商會社), 군산 객주 조합(群山客主組合), 창성사(昌盛社)와 같은 상회사들이 군산항을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이들 상회사에 소속된 객주들을 중심으로 군산항에는 상공인 층이 증가되고 무역 규모가 확대되는 등 발전해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상회사 설립과 객주들의 활동에 대해 일본인들은 통상 장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금지시킬 것을 요구하였고, 상회사에 참가하지 못한 일부 객주들의 불만이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일제는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한국 재정에 깊게 관여하며 메가다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를 중심으로 재정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성장을 해나가고 있던 군산 지역 객주들은 황실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었고, 일본 상인의 이윤 확보를 위한 정책들이 실행되면서 군산 지역 객주들의 성장은 저지를 받게 되었다.

객주들은 이러한 움직임에 상회사를 중심으로 공동으로 대응하면서 사회 경제 운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객주들은 객주 회사 설립을 청원하였다. 황실의 보호막은 사라졌지만 스스로 대책을 세워 상회사를 조직하려 하였다. 이들 객주는 국채 보상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07년(융희 1) 객주 14인이 국채 보상 의무 취지서를 발표하였고, 다른 지역에서 보이는 운동 방식과 달리 군산항 객주 상회사가 중심이 되어 국채 보상 의무사(國債報償義務社)를 조직하여 의연금을 확보하였다. 1909년(융희 3) 10월에는 군산의 실업가와 전주의 실업가들이 자금을 모아 호상관 상회(湖商館商會)를 창립하였다. 이들 대부분을 객주를 비롯한 실업가들로 상회사를 설립하여 객주와 상여(商旅)를 연락함으로써 상업 확장을 도모하는 가운데 외국 물품을 직접 방매하는 등 상행위에 적극 나섰다. 마지막으로 일본 상인들의 진출과 내륙 행상의 확대로 인해 객주의 기본 업무인 위탁 판매와 매매 알선이 침범을 받게 되자, 객주들은 내장원과 연계된 상활동이나 외획전 취급을 통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였다.

[객주의 쇠퇴]

일제 강점을 전후하여 일제는 「조선 회사령(朝鮮會社令)」, 「객주 취체 규칙(客主取締規則)」, 「시장 규칙(市場規則)」을 제정하여 객주업을 통제함으로써 한국인 객주의 기능을 무력화시키는 한편 한국의 객주와 일본인 상인들을 동일 기구에 편제하여 한국인 객주의 상행위를 제한하고자 하였다.

회사령을 통해 한국인 객주 회사 설립을 제도적으로 봉쇄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 이전에 설립된 군산항 신상 회사(群山港紳商會社), 군산항 합자 객주회(群山港合資客主會), 호상 여상회(湖商旅商會) 등이 근대 회사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봉쇄당하였다. 일제는 이처럼 회사령을 통해 한국 객주의 자본 결집을 통한 기업 활동을 제한하는 한편 시장을 비롯한 유통 거래지를 대대적으로 통제하고 간섭하고자 하였다. 객주 취체 규칙에서는 객주의 영업 활동을 위축시켰다. 객주들이 경찰서에 손님들의 출발, 숙박에 대한 보고를 매 건마다 한 시간 안에 관할 파출소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시장 규칙」에서는 객주의 활동을 제한시켰다. 객주 존재 자체를 시장에서 구축하고자 하였고, 공공성과 객주 거래의 문제점을 내세워 객주를 몰아내고자 하였다. 그 결과 1900년경에 90여 명이던 군산 지역 객주가 1910년 중반에는 51명으로 감소되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 기반이 약해진 군산 지역 객주들은 1912년 군산선과 호남선의 개통으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철도의 개통으로 화물 운송의 중요 수단으로 철도가 부각됨에 따라 상권의 중심이 포구에서 역전으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도역을 중심으로 화물의 독점 운송을 하고자 하는 일본인 중심의 합작 회사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런 성격의 회사 출현으로 인해 기존 객주업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새롭게 설립된 일본인 중심의 합작 회사에서는 위탁 판매업, 창고업 등 전래의 객주 업무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운송업과 인부 청부업(人負請負業) 등을 겸영하는 종합적 성격의 회사를 지향하였다. 이는 곧 포구와 장시를 연결하면서 활동해온 군산 지역 객주의 존립 근거를 축소시키게 되었다.

일제는 이렇게 독자적 조직을 상실한 객주들을 개별적으로 철저히 통제함과 동시에 그들을 일본인 주도의 상업 회의소에 인위적으로 편제하여 한인 객주의 이해를 일본 자본의 이해에 종속시켰다. 이에 따라 개항 이래 유통계의 주역이었던 개항장 객주들은 강점 이후 대거 몰락하였으며, 일부 성공한 객주들도 일본인 자본가의 동반자로서 같이 하는 존재로 바뀌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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